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Sep 21. 2021

만약에

라라랜드 비공감자들에게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라라랜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비공감자다. 사람들의 극찬에 몇 번을 보려고 시도했다가 중간에 '도대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난리야?'하면서 보는 걸 포기했던 영화이다.


그런데 [살고 싶다는 농담]의 저자이자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이 영화를 '만약에'의 판타지라고 평하며, 자신도 마지막 시퀀스를 보기 전까지는 거의 이 영화를 싫어할 뻔했다고 고백한다. 그럼 그가 라라랜드 비공감자들에게 전하는 라라랜드의 매력은 무엇일까?


책에 나온 라라랜드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쯤, 그간 살아온 삶에서는 아마 수천에서 만 번쯤 생각했을 '만약에'의 가정이 주는 위로를 이야기한다.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영화 '라라랜드'에 도전해봐야겠다.


- 아래는 책 [살고 싶다는 농담] 중에서  편집



만약에, 라고.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때 훼방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때 거기 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술을 마시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때 네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조금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만약에 네가 조금 더 우리를 믿었다면. 만약에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만약에 인연이 끝났던 그 마지막이라도 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면. 만약에. 만약에. 그렇게 만약에, 가 쌓여 뭔가 단단히 움켜쥘 수 있는 닻과 같은 것이 되어준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인생은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일의 연속이다.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라라랜드>에 공감할 수 없다는 관객의 팔 할은 주인공들의 태도에 몰입하지 못한 결과일 공산이 크다.

만약 생살을 긁어 파내듯 아프기 짝이 없는 <라라랜드>의 현실적인 버전을 보고 싶다면 라이언 고슬링이 출연한 영화<블루 발렌타인>을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비관적이고 현명한 영화는 연애 문제를 앓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이터널선샤인> <500일의 썸머>와 함께 불멸의 레퍼런스로 오랫동안 언급될 만하다.


<라라랜드>의 모든 갈등은 예상한 시점에서 찾아오고 쉽게 해결된다. 빤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채우는 정서는 좋게 말해서 낭만적이고 정직하게 말해서 예측 가능한 지루함이다. 겨울이 오기 전, 그러니까 마지막 시퀀스 전까지 그렇다는 이야기다.


<라라랜드>는 이 영화가 1950년대가 아닌 2016년에 개봉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대적인 뮤지컬 영화로 정체성을 확실히 한다. 현실감각과 진중함, 그리고 사유의 가능성마저 모두 챙기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그들이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 버전의 '만약에'가 화면을 채운다.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다. 주인공의 가정은 완전무결한 환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논리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등장 인물들은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시공간은 수시로 허물어져 뮤지컬 스코어와 함께 어우러진다.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다. 모든 선택의 순간 가장 최상의 결과만이 존재했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 판타지다.


그럼에도 이 아무 의미 없는 상상은 관객을 무너뜨린다. 우리 모두가 그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잔인무도함을 이기기 위해 만약에, 라고 만 번쯤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매번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아름답고 아련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그럴 리 없다는 자괴감과 행복을 빌어주는 선의가 섞여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의 힘을 빌려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를 살아간다. 라이언 고슬링의 마지막 모습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 보러 계족산 다녀오는 길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