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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23. 2021

시인의 마을엔 달도 밝지~

경북 영양 조지훈 생가와 주실마을 숲

< 승무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1939년 12월 『문장』에 발표된 조지훈의 시이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이 시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교과서에 나와서 구구절절 해석하며 공부한 시니까^^


처음 교과서에서 접했을 때 반해서, 한달음에 외웠던 '승무'를 쓰신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영양 주실마을(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194-1)에 다녀왔다. 때는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사실 주실마을은 조지훈 생가보다는 200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주실마을 숲을 보고자 함이 더 컸다. 작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이라는 함양 상림을 보고 온 뒤, 마을숲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 주실마을 숲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한 번 가야지~ 가야지~하고 벼르다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중순에 다녀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양이 좀 지역이 높다보니, 낙엽이 빨라서 주실마을 숲의 나무들은 대부분 잎을 거의 떨군 뒤라 기대했던 아름다운 숲은 보지 못했다. 대신 조지훈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된 곳이다.

우리에게 청록파시인으로 알려진 조지훈(1920-1968)은 1920년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서 조헌영(한의학자,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양,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해방 이후 『청록집』, 『풀잎단장』, 『역사앞에서』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그가 태어난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호은공으로 불리는 조전이 그의 아들 정형과 함께 1629년 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이 무렵 종택을 세웠다. 호은종택이라 불리는 이 집에서 조지훈이 태어났다. 주실마을에는 호은종택 외에도 조지훈이 유년시절을 보낸 방우산장, 조지훈이 어릴 때 다니며 공부했던 월록서당, 지훈문학관, 지훈시공원, 옥천 조덕린의 고택인 옥천종택과 그가 문생을 가르쳤던 창주정사, 만곡 조술도가 세운 만곡정사, 오징어게임처럼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눈에 띄는 주곡교회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주실마을 숲은 '시인의 숲'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주실마을 입구에 있으며 주민들이 오랜 세월 정성으로 가꿔온 숲이다. 이 숲을 지나 '주실마을'이라 쓰여진 돌표지석을 따라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한옥이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종택이다.(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입구에 비석이 세워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호은종택은 주곡리 입향조 조전의 아들 조정형이 인조 때 건축한 솟을대문과 맞배지붕의 口자형 전통한옥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영남 북부지방 양반가의 대표적 양식이다. 정침과 관리사로 나눠져 있으며, 정침은 口 자형에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에 정면 7칸 측면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丁字)형식으로 되어있고, 서쪽 1칸에는 조지훈(동탁)의 태실이 있다.


6.25때 인민군에 의해 일부가 불탔으나 1963년 원형대로 복구하였다. 대문과 중문에는 한말부터 태극기를 조각·채색하여 끼워두고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호은종택에 전해져 오는 가훈은 삼불차(三不借)인데 재물과 사람(양자) 그리고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지훈 집안의 꼿꼿한 성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꽃분홍 커다란 네모판에 시가 쓰여진 작품이 있는 집앞을 따라 지훈문학관으로 갔다. 가는 길에 있는 굼뱅이연구소란 이름이 특이한 곳이 눈길을 끌었다.

지훈문학관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조지훈의 소년시절 자료,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 걱정의 현대사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부인 김난희 여사의 서화작품, 지사로서의 삶, 시와 산문, 학문 연구의 핵심 내용. 삶의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전시물 중에는 지훈 선생이 쓴 주례사와 여러 곳에서 받은 감사장, 위촉장, 표창장 등의 자료와 그의 체취가 배어있는 애장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 그의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헤드폰을 통해서는 그가 여동생 조동민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를 들을 수 있다. 문학관 입구에 느린우체통이 있어, 엽서에 글을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보내준다고 해 집에 있는 아이들 앞으로 간단한 엽서를 써서 넣었다. 문학관은 원래 입장료가 있는 곳인데, 우리가 갔던 날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문학관을 나와 맞은편의 승무관 앞마당에 세워진 조각을 본 뒤 지훈시공원으로 향했다.


이 길목에 주곡교회가 있는데, 건물 외벽에 동그라미 세모 네모 모양이 배치되어 있어 오징어게임 교회인가? 하며 즐겁게 구경했다. 이 교회 앞 길가에 활활 타오르는 듯 붉게 물든 공작단풍나무가 있어, 가을느낌을 제대로 받았다. 빨간 단풍나무 위에 파란 하늘, 그리고 그 안에 한 점 하얀 반달이 그대로 그림이 되는 풍경이었다.

조지훈의 동상과 20여 개의 시비가 세워진 지훈시공원은 지훈문학관 뒤편 산골짜기 지형지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했다. 작은 쉼터와 공연장도 있어 산책로를 따라가며 조지훈의 시세계에 빠질 수 있는 곳이다.

아래로 내려오면 방우산장이 보인다. '조지훈 본가'라는 이곳은 그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은 것이다. 조지훈은 1920년에 호은종택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인 조현영을 따라 1936년에 상경할 때까지 성장기를 이 집에서 보냈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와 같은 동화를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우고, 그의 형 조동진(아호 世林)과 함께 "꽃탑회" 활동을 하며 나라를 잃은 슬픔과 울분을 난독과 남작으로 달래던 곳이 바로 이 집이다. 조지훈의 일가가 떠난 이후 이 가옥은 여러 사람들이 거쳐 살면서 많이 훼손되어 상당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하였다. 방우산장은 조지훈이 생전에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라는 수필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이다.

다음으로 간 곳이 호은종택 뒤편의 옥천종택이다. 호은 조전의 증손자이며, 영조 때의 문신 옥천 조덕린이 1694년(숙종 20)에 지은 집으로 185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56년 재건하였다. 옥천종택은 살림채로서 정침과 글 읽는 별당 기능의 초당(草堂)과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 된 17세기 말 양반주택이다. 이곳은 보수중이라 들어가볼 수 없어 옥천종택의 오른쪽 돌계단을 걸어 올라간 위에 자리한 창제정사의 담너머로 고택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살림채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는 口자의 평면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으로 배치되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 다르다. 또한 지붕을 두꺼운 八자 모양으로 붙인 박공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히 오래된 건축기법을 갖고 있다.

조선 정조대의 유학자인 만곡 조술도가 만년에 지었다는 만곡정사는 옥천종택 왼쪽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해 지기 전에 주실마을숲에 들렀다 가느라 서두르다가 이곳은 놓쳤다. 원래는 영양면 원당리 선유굴 위에  '강정'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문하생들이 주곡동으로 이전하여 '미운정'이라 하였고, 1802년에 주곡동 용봉 아래에 다시 이전하였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만곡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1호)

서둘러 주실마을숲 가는 길에 월록서당이 보여 그곳도 들렀다. 월록서당은 조선 영조 49년(1773)에 월하 조운도 선생이 의견을 내고, 한양 조씨, 야성 정씨, 함양 오씨가 주축이 되어 후진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왼쪽은 존성재, 오른쪽은 극복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월록서당 현판은 정조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선생의 친필이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서당을 잠시 둘러본 뒤 마을숲으로 갔다. 그런데 그 사이 산골마을의 짧은 해는 지고 바람은 스산한데, 나뭇잎 다 떨어진 앙상한 숲에 따로 주차할 곳도 안 보이고 하여, 숲 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주변에서만 둘러보고 주실마을을 떠났다. 이 숲을 보기 위해 왔건만, 가장 짧은 시간 머물렀다. 저녁 하늘에 뜬 반달이 하얀 얼굴로 전송하며, 숲이 초록으로 살아나 아름다움을 되찾을 봄이나 여름에 다시 한 번 찾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조지훈 시비가 있는 주실마을숲


* 주실마을 숲은 어떤 곳이에요?

시인 조지훈의 생가로 알려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입구는 숲으로 싸여 있다.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을 숲은 영양에서 봉화 가는 길가에 있다. 길가에 있으면서도 훼손되지 않고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모여 있다.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숲은 그 향기부터 달랐다.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에선 100여 년 전 마을 입구에 우거져있는 숲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후에도 밭을 매입해 나무를 심었고 종중에선 숲을 마을의 한 부분으로 발전시켰다.


덕분에 당산목으로 불리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비롯해느릅나무까지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입구에 늘어선 나무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숲을 지켜주며 더불어 살고 있다.

그렇게 꾸준히 공존한 까닭인지 지난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선정의 이유도 공존이었다. ‘생명의 숲’ 관계자에 따르면 “주민들이 나서서 숲을 가꾼 것이 주요했다. 수백 년 정성껏 잘 가꿔진 숲이라 울창했고 다양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문 숲 선정당시 사진 펌


* 조지훈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지훈은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사의 주류를 완성함 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준 큰 시인이다.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 『문장』지에 시 「고풍의상」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39년 11월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풍의상」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승무」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다.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알려준다.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 그가 남 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 「낙화」, 「고사」와 같은 시는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詩)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 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겼고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매우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 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염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 한국문화사서설」, 「한국민족운동사」, 「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조지훈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풀잎단장(斷章)』(1952)·『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1956)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박목월·박두진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 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 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청록집』 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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