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분의 [해님 달님] 새로운 해석을 읽고 나면, 현시대와 맞아떨어지는 전래동화의 놀라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도대체 몇백 년을 앞서 본 것일까요?
< 부모 콤플렉스의 상징, 호랑이 >
부모님의 은혜는 정말 하해와 같은 희생으로만 가득한 것일까? 회한과 사랑으로 절절한 사모곡 속에서 마치 관세음보살이나 성모 마리아처럼 그려지는 부모 심성이 과연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자녀들의 빛나는 앞날을 위해 못 먹고 못 입으며 공부시켰던 예전 부모들이나, 사교육으로 허리가 휜다는 요즘 부모들이나 그들의 자녀사랑이 과연 오롯이 자녀를 위한 봉사 정신에서만 기인하는 것일까?
자녀의 취업과 결혼 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조종하며, 자녀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부모들일수록 자신들의 양육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모성과 부성의 뒷모습이 때론 냉혹하고 잔인할 수 있으니, ‘해님달님이 된 오누이’ 이야기는 자식사랑의 진면목에 대해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얘기는 가장이 없는 가난한 집, 어머니의 떠남과 홀로 남은 오누이의 외로운 처지에서 시작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고단하지만 무능한 어머니의 조합은 비참하고 외로운 아이들 처지의 원인을 제공하는 환경이다. 오누이의 가난함을 물질적인 빈곤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민담 속 조건들은 무의식의 심리 상황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일과 술, 사회 활동으로 바쁜 아버지는 항상 집을 비우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기 일에 바쁘니 아이들은 툭하면 아파트에 홀로 남게 된다. 낯선 사람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당부를 하며 21세기의 부모들도 아이들을 곧잘 버려두고 나가니 홀로 남은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고개 넘어 이웃마을 잔칫집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호랑이를 만나 무서운 거래를 한다. 떡 하나 주면,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라고 말하는 호랑이의 유혹은 무엇일까. 어머니는 자녀들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들이 사실은 자신의 신체와 영혼이 모두 먹히는 건지는 몰랐을 것이다. 현실의 부모들도 그렇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를 잘 키운다는 명목으로, 때론 비루하게 때론 포악하게 변할 수 있다. 아이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고 말하는 어머니들, 과연 그들이 아는 돈 버는 방법은 매춘뿐이었을까? 잔인한 마피아들을 그린 영화 ‘대부(Godfather)’와 드라마 ‘소프라노(Sopranos)’에 나오는 자녀 사랑과 효심은 또 얼마나 그지없는가. 심지어는 자녀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부모들도 이게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 강변한다. 반대로, 독립적 삶을 피하면서 부모를 착취하는 ‘영원한 아이(Eternal Child)’ 같은 자식들도 효심 때문이라며 영악하게 자신의 의존심을 포장한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폭력적 실상은 또 어떠한가. 장애아나 결손가정 아이처럼 약하고 불운한 아이들을 왕따시키는 데 자녀보다 한 술 더 뜨는 편견과 이기심에 가득한 부모들, 자기 아이는 조금이라도 손해 보면 안 된다며 물불 가리지 않고 마구 떼를 쓰는 부모들은 호랑이보다 더 사악하고 위험하다.
물론 떡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해 뼈가 빠지게 일하고 험한 길을 넘어오는 어머니는 착한 어머니이고, 그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로 변장해 오누이마저 잡아먹으려고 하는 호랑이는 나쁜 어머니라는 식으로, 나는 좋은 엄마 저 여자는 나쁜 엄마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넘어가고 싶을 수도 있다.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위해 모든 걸 다 해 주는 어머니가 전자라면 아이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어머니는 후자라고 단순화시키면 적어도 자신은 하릴없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터이니.
문제는,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때,
과연 누가 선하고 악한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는 현실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고 억지를 쓰는 막무가내 어머니와 어떤 일이건 자녀 앞을 막아서며 나서는 바람에 결국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자녀를 만드는 어머니들이 자신을 지극히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어머니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떡 하나라도 더 먹이겠다고 고개를 힘들게 넘고 넘던 어머니가 아이들을 잡아먹는 나쁜 호랑이 어머니로 변하는 건 그만큼 순식간이다. 제 허영과 욕심에 자녀의 건강한 삶을 압살하는 부모들의 이기심이 모습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민담 속 오누이는 다행히 호랑이의 진짜 모습을 알아채고 우물가 나무 위로 도망가 숨는다. 이때부터 아이들과 호랑이의 머리싸움이 시작되는데, 마치 자녀들이 부모의 정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한 후 바야흐로 독립해서 나가려는 과정과 흡사하다.
호랑이는 우물 속에 비친 아이들을 바가지로 건지려 하는데 이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실체를 보지 못한 채 자녀의 퇴행을 조장하고 유아기의 그림자만 붙안고 있는 부모들 모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꾀 많은 오빠는 참기름을 바르라 하고, 동생은 도끼로 찍어 올라오면 된다 말한다. 옥죄는 부모를 따돌리는 방법으로 처음엔 참기름 바르듯 거짓말도 하고 적당히 둘러대는 것도 통하겠지만, 언젠가 찾아오는 정면충돌의 순간엔 도끼로 찍듯 확실하게 서로 분리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왜 하필 하늘에게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였을까? ‘하늘’이란 부모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적 단계를 상징한다. 부모와 엉겨 살던 자녀들이 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로 확실하게 도약해서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떠나게 되면 자녀의 독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들이 아무리 자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점이 온다. 이미 부모 자식을 이었던 인연의 끈은 썩은 동아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릴없게 된 부모들은 호랑이가 떨어져 붉은 피를 흘리고 죽어버리듯 자녀들의 새로운 세계로 끝까지 따라가려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본래 자기 자리인 땅으로 다시 하강해서 떠난 아이들의 장도를 축하해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듯, 자녀들은 자신들 세상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다. 자녀들의 독립을 방해했던 부모들이 집착의 끈을 놓고 나면, 호랑이가 붉은 수수로 다시 환생하였듯 오히려 더 아름다운 사랑을 베풀 수도 있다. 부모가 묵은 가치관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진짜 자신의 길을 가려는 자녀들의 독립을 확실하게 축하하고 믿어 줄 때 부모 존재의 진가는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오누이가 각각 변한 해와 달은 창조의 시작이며 우주의 두 축이다. 태양이 우주의 대부라면 달은 땅의 대모이다. 이집트의 태모신 이시스는 태양과 달을 모방한 뿔을 달고 있고,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은 해와 달이 오누이이며 우주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제 자녀들은 새로운 세계를 주재하는 창조자이며 그들 자신이 부모가 될 준비를 한다. 물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호랑이 상징으로 구체화된 어머니 콤플렉스와 아버지 콤플렉스는 계속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겠지만.
부모 콤플렉스의 상징인 호랑이는 힘없고 약한 동물을 통째로 먹어 치우는 동물이란 점에서, 화가 나면 해일과 지진과 화산 폭발 등으로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집어 삼키는 배고픈 자연(Hungry Earth)이자 끔찍한 어머니(Terrible mother)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해와 달처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게 만드는 의식(Consciousness)은, 호랑이와 같은 자연적 무의식(Unconsciousness)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분화되어 나간 후에야 비로소 탄생한다. 호랑이, 즉 물질과 육체의 영역을 떠나 하늘, 즉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에 상승한 후에 경험하는 보다 높은 단계다.
자, 그렇다면 낳고 키웠다는 이유로 우리의 독립과 행복을 방해하는 부모를 과연 어떻게 극복하란 말인가. 또 그렇게 키운 자식들과는 어떻게 건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 단순히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독립선언이 될까? 화내고 다투면 부모 자식 사이 인연이 끊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뇌세포 속 의식과 무의식의 잠재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들을 보다 객관적이고 명징한 의식으로 파악하기 전에는, 지구 반대편에 살거나 부모와 매일 매일 소리 높여 싸운다 해도 내 안에 들어 있는 부모 콤플렉스를 제대로 소화시켜 배설해 낼 수가 없는 법이다.
너랑 똑같은 아들 딸 낳아 키워 보라는 부모들의 저주는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부모와 닮은 우리 콤플렉스를 제대로 들여다보라는 주문일 수 있을 터. 바로 그 부모들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던 당신 부모들의 자식이 아니었던가. 부모 자식 사이 질긴 인연의 끈은 유전자에 내장된 정보만큼이나 우리 마음 속 깊이 똬리 튼 채 면면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나미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뉴욕에서 분석심리학과 신학을 공부한 정신과 의사입니다. 단편 소설 「물의 혼」으로 『문학사상』에서 등단하였고 2002년에는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를 펴냈습니다. 꿈과 신화,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분석심리학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대학교 병원 인권센터장으로 임명된 분이기도 합니다. 최근 펴내신 책으로는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쌤앤파커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