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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Mar 25. 2023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의 이야기

지난 2월 <찌질한 위인전>에 나온 김수영 시인의 이야기를 읽고, 시인의 아내 김현경이 쓴 책 <김수영의 연인>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은 2013년 2월에 나온 책으로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아내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김현경 여사가 시인의 사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쓴 책이다. 김수영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40년 넘게 그녀는 문단을 멀리 했다. 그런데 뒤늦게 책을 낸 것은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라고 한다.

2013년 책을 펴낼 당시 그녀의 나이는 86세였다. 책이 나온 지 10년만인 2023년 올해 그녀의 나이는 96세이시다. 1927년 토끼띠인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 찾아보니, 용인 자택에 사시며 김수영의 책을 늘상 읽으며 소일하시는 김현경 여사는 해마다 미국 달라스에 사는 며느리와 두 손녀를 만나러 가서 두 달간 머물다 오시는데 혼자서 12시간 30분이 걸리는 비행도 척척 해내실 만큼 정정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그녀는 1942년 처음 시인을 아저씨로, 그저 꿈 많던 한 문학소녀의 선생님으로 맺은 첫 인연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굴곡진 삶을 시인과 함께했지만 여러 번의 곡절을 겪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놓지 않았던 시인,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나 곁에 없어도 그때 자신을 향하던 당신의 마음이 지금도 부끄럽게 살아 있는 오늘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고백한다.  

책에서는 “내곁을 떠난지 어언 45년…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 중입니다”라는 진주황색 띠지에 쓰인 글과  “김 시인은 내게 운명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김 시인과 결혼할 것이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녀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김수영이 아내에게 느끼는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불안에 떨었던 모양이다.  아래 시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 사랑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刹那)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이렇게 시인이 불안에 떨었던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징집되었던 시인이 거제도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와보니, 전쟁중에 홀로 김수영의 아들까지 낳은 김현경이 자신의 친구였던 이종구와 부산에서 살림을 차린 사실을 알고 찾아가자 단칼에 거절해버려 눈물을 흘리며 돌아나와야 했던 일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중에 '죄와 벌'이란 시에서 비오는 날 길거리에서 지우산으로 아내를 때리고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보다 남들이 폭력하는 자신을 알아봤으면 어쩌나, 그보다 현장에 버리고 온 지우산을 아까워하는 자신의 찌질함을 고백하는 내용을 썼으리라.

김현경이 쓴 산문집을 읽으며 전쟁 이후 재결합해 살면서 시시때때로 시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야 했을 김현경의 속내가 궁금했다. 과연 그녀의 입장은 무엇일까?

김현경의 이야기다.
- 광화문 근처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 준을 기다리는 동안 당시 조선일보사 모퉁이에 있던 영화관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Federico Fellini) 감독의 <길 (La strada)>을 보았다. 수영과 나는 좋은 영화가 개봉되면 항상 같이 극장을 찾았다. 그날은 다섯 살 된 둘째 아들 우도 함께 갔다. 영화를 잘 보고 나오는데 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대로변에서, 그것도 어린 아들 앞에서 부인을 때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시에다 우산을 두고 온 일이 아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에 는 무엇이 섞여 있었을까?

그 일이 있고 한참 후에야 그날, 수영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일단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수영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아니 그보다는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남루한 모습을 한 채 방랑하는 야바위꾼으로 나왔던 그 영화 상영 내내 펼쳐지던 황량하리만큼 넓은 영화의 공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수영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8년 가을이었다. -

그날 함께 봤던 영화 속에 나온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이 자기 사진과 겹쳐보이면서 문득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오른 시인이 아내를 길거리에서 팬 것이다. 시인의 가장 옆에서 오래도록 동고동락한 가족이자, 시인의 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독자의 눈으로 파악한 분이 해석한 창작배경이니 이 말이 맞지 않을까? 어쨌든 시인에게 아내의 일탈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인 6.25 전쟁동안 상황에 떠밀려 비록 1년가량 시인을 떠나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았지만, 시인이 떠난 뒤로도 55년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조를 지키고 살아온 김현경 여사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김현경 여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시인과는 어떻게 만나 사랑을 키웠고, 한국전쟁 당시 이종구와 살게 된 내력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1927년 종로구 사직동의 부유한 사업가의 집에서 태어난 김현경은 신여성이었다. 문단이란 말도 생소했던 1940년대 이화여대 영문과생이었던 그녀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폴 발레리의 시를 읽으며 프랑스 문학에 심취했고, 이화여대 교수였던 정지용의 예쁨을 받으며 시경을 배웠다. 김소월의 ‘산유화’에 곡을 붙인 작곡가 김순남이 오촌 당숙이라, 김순남의 집에 놀러가서 자연스럽게 임화 오장환을 비롯한 문인들과 어울렸다. 미와 지성을 겸비한 그녀는 남성 문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는데, 김수영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도쿄 유학시절 친구였던 이종구를 통해 1942년 김수영을 처음 만났다. 이듬해 김수영이 귀국하며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녀에게 김수영은 첫사랑이 아니었다. 이른바 ‘흑인 시’를 쓰던 배인철(1920∼1947)과 사귀었는데, 1947년 남산에서 데이트를 하다 한 괴한이 쏜 총에 애인이 죽는 것을 옆에서 봤다. 그녀도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배인철이 공산주의자였다’란 소문이 돌자 함께 있던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났지만 김수영만은 예외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외면했지만 김수영만은 제게 남았어요. ‘네 재주가 아깝다. 너는 문학을 해야 한다’며 저를 다독여줬죠.”

1949년 초겨울부터 동거에 들어간 김수영과 김현경은 1950년 4월 결혼한다. 하지만 둘의 행복은 짧았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수영은 징집당해 전선으로 갔고, 포로가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1952년 김수영이 수용소에서 나온 뒤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녀도 따라가서 부산에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수영과의 연애 이후 자연히 왕래가 소원해졌던 이종구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종구에게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 김수영의 허락을 받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엉망이라  기다리는 동안 청소하고 빨래하고 저녁상까지 차려놓은 김현경을 보고 반색한 이종구는 취직을 빌미로 그녀를 하루 이틀 집에 붙잡아 두게 되었고, 결국 그 집에 1년 넘게 머물게 된다.

그녀를 이전부터 흠모했던 이종구가 김현경을 끝내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6개월쯤 지난 어느 아침 김수영이 이종구의 집에 찾아와 이종구에게 "자네가 나에게 이러면 안 되지."하고 말한 뒤, 김현경을 보고 “가자”고 말했지만 김현경은 먼저 가있으면 곧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돌아가던 수영의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슬프고 처량하기보다는 당당하고 결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서울 환도 후에도 이종구와 함께 살다가, 이종구가 그녀와 정식 혼인을 하고 싶어해서 혼인신고를 하려면 먼저 이혼부터 해야 하니 김수영에게 이혼 도장을 받아 오라며 집착에 가깝게 광적으로 압박을 했다고 한다. 그의 등쌀에 밀려 수영을 찾아간 그녀. 종로 보신각 옆에 있던 주간잡지 ‘태평양’ 건물 2층에서 그를 만나 어렵사리 김수영의 도장을 받아왔지만 차마 이종구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도장을 넘겨주면 수영과의 모든 인연이 끊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수영을 만나지 못했노라고 거짓말하고는 탈출계획을 세운 뒤 달랑 핸드백만 들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이종구가 찾을  수 없도록 도피생활을 하다가 서울 성북동에 방을 하나 얻고는 이종구와도 김수영과도 결별하였으니 이제 한 여성으로서 여학교 시절 꿈이었던 소설가가 되기 위해 신춘문예 공모를 겨냥한 습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소설을 쓰다가, 몇 달 뒤 '적어도 수영에게 이종구를 떠난 사실은 알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김수영에게 엽서를 보내 삼선교 근처 다방에서 만나자고 한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수영을 떠나 있었지만 결국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그 만남의 자리에서 수영은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근처 거리를 천천히 걷다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결국 그들은 두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나 1968년 시인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했다. 둘 사이에 준과 우 두 아들이 있는데, 시인은 자신을 꼭 빼어닮은 둘째 우를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김수영은 번역일도 많이 하고, 서울대와 연세대 강단에도 섰지만 수입이 비정기적이라서 김현경이 생계를 위해 10년간 양계장을 운영했고, 바느질과 옷 만드는 솜씨를 인정받아 신문로와 동부이촌동에서 의상실을 경영하다가 이후에는 미술 컬렉터 및 디렉터로 활동했다. 현재는 김수영의 생전 집필실을 용인 자택에 재현해두고 그의 시를 읽으며 김수영 시인의 아내이자 독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풀’ ‘폭포’를 비롯해 수많은 현대시의 걸작들을 남긴 김수영 시인의 육필 원고 대부분은 김현경의 글씨라고 한다. 시인은 초고를 원고지에 안 쓰고 백지에 썼기 때문에 초고가 완료되면 무조건 아내를 불러 원고지에 정서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저 글씨만 쓰게 한 게 아니라 김수영이 쓴 시를 최초로 읽고 평가하는 독자이자 평론가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시인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때문에 방황하지 않았던 점을 가슴뿌듯하게 여기며 여전히 남편과 남편의 시를 사랑하는 김현경 여사가 100세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천수를 누리기실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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