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Nov 09. 2023

자두 (수정)

여로모로 불편한 작품

* 다른 곳에 써둔 글을 브런치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중간에 많은 부분이 몽땅 빠져있는 걸 하루 뒤에 발견하고 수정해 올립니다.*



여름 더위를 잊게 해주는 과일로 수박을 많이들 떠올리지만 사실 수박은 과일이 아닌 채소다, 토마토와 마찬가지로. 채소는 밭에서 나는 것, 과일은 나무에 열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다. 수박은 정확히 따져보자면 과채류 채소이다. 따라서 여름을 대표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일을 찾아보자면 '자두'가 있다.


자두 가운데서도 겉보다 속이 더 붉은 '피자두'는 한입 베어물면 피처럼 붉은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단단한 과일이다. 어린 시절 이웃집 기순이네 피자두를 서리해먹던 추억을 지닌 시아버지가 담도암에 걸려 세 번째 입원한 병원에서 간병하며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주혜의 '자두'는 2020년 창비에서 나온 중편 소설이다.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데뷔한 신인작가 이주혜의 첫 작품이다.



이주혜 작가는 이 책에서 오늘날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돌봄노동'을 통해 가부장제와 여성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는 1994년의 여름에 비견할만한 더위가 한창이었던 여름에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맡게 된 주인공 은아와 남편 안세진, 암투병끝에 섬망증세까지 보이는 시아버지 안병일, 부부의 간병을 도와주는 간병인 황영옥이 등장한다.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한 인상을 준다.


하나는, 9년차 번역프리랜서로 일하는 주인공이 이제 막 번역을 마친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 나온 내용을 떠올리며 시작하는 프롤로그와 이어서 전개되는 소설의 주요 내용이 실은 번역한 책의 역자서문에 쓸 내용이라는 에필로그가 액자구조와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실제로 이 책을 번역한 이가 자두를 쓴 소설가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 덕분에 이 액자는 제법 그럴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소설의 전개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나오는 '나'가 이 소설에서는 모두 세 명이라는 사실이다. 처음과 끝, 대부분의 소설 전개에는 며느리인 은아가 '나'로 나오지만, 중간에 시어버지 안병일이 '나'가 되어 자두에 집착하는 섬망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고, 간병인 황영옥이 '나'가 되어 왜 시아버지에게 시시때때로 "죽어요.. 죽어.." 하면서도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고 부디 좋은 날 죽어요"하고 말하는 이유를 살며시 알려준다.


7쪽에서 시작해 134쪽으로 끝나는 길지 않은 이 소설의 내용 속에는 가부장제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 은아와 황영옥 사이에 생겨나는 오해와 이해를 거친 말 없는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으로 늘 단정하고 깔끔함을 유지하면서, 며느리를 마치 딸처럼 대하며 다정다감하던 시아버지가 섬망 중에 숨겨놓았던 본심을 내보이는 걸 보며 시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진 뒤에도 그 사랑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판에 박힌 가부장제 비판에서 작품을 구원하는 소설적 성취"(해설 강경석)이자 가족과 여성의 존재에 대한 독자들의 고민을 풀어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데...


글쎄, 시아버지가 호전돼서 병원을 퇴원한 뒤에 함께 모시지 않고 따로 살다가 몇 달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른 얼마 뒤에는 세진과 별 잡음없이 이혼한 은아의 모습이 가부장제 속 여성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가부장제의 그늘을 벗어나려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처음엔 들었다.


이혼은 그냥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와 같은 말이고, 은아는 뒤늦게 깨달은 가부장제의 그늘을 제대로 비판하지도 않고, 잘못을 고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한때는 행복했다 여겼던 부부관계를 끝낸 것인데 이게 어떻게 가족과 여성의 존재에 대한 독자의 고민을 풀어주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부장제와 돌봄노동, 그속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생각들이 축을 이루고 거기에 결혼과 이혼, 간병인의 세계 등이 횡을 이루는 가지를 뻗어나갔다. 좋은 책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자꾸 그 내용을 곱씹게 해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주혜의 자두는 좋은 책이고 한번쯤 읽어 볼만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홀시어머니와 18년째 한지붕 아래 살고 있다.(결혼하고 나서 7년만에 합가했다) 2년 전 코로나백신이 처음 나와 1차 접종을 마친 뒤 9일만에 시어머니는 급성뇌경색이 오셨다. 아침식사중에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끼신 어머님은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가시다가 복도에서 쓰러지시며 머리를 바닥에 쿵!하고 부딪혀 뇌출혈까지 크게 생기고 말았다.

뇌경색과 뇌출혈은 서로 상반된 치료법을 써야하는 병인데, 당장 뇌출혈부터 잡는 게 우선이라 신경과쪽의 환자가 되어 병원생활을 시작하셨다. 첫 병원생활은 2주만에 끝났지만, 퇴원해서 집에 계신 동안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셔서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가셨다. 검사 결과 전해질 수치가 떨어지면서 생긴 일이라 신장내과쪽으로 다시 입원을 하셨다. 그땐 3주 넘게 하셨고, 퇴원하신 뒤로 외래로 다니며 약조절을 하시다가 전해질 수치가 잘 나오고 별다른 이상이 없어 연말에 약을 끊었다. 그러나 한 달만에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세 번째 입원을 하셨다. 그땐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계셔야했다.

어머님께서 병원에 계신 동안 매일 병원을 찾아 어머니를 살피고 하나부터 열까지 병원 관련 일처리를 한 건 오직 며느리인 나 혼자였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계실 땐 남편이 나대신 어머님 곁을 지킬 때도 있었지만, 코로나때문에 입원실 출입을 하려면 코로나검사를 받고, 음성이라고 판명된 뒤에만 가능했다. 그래서 다른 가족이 가게 되면, 그 사람도 코로나검사를 해야 하고, 나 역시 다시 입원실에 들어가려면 코로나검사를 새롭게 또 해야 해서 그 절차가 너무 번거로워 그냥 나 혼자 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어머님도 섬망이 오셔서 주무시다가 이불에 실수를 하시거나 방바닥에 실례를 하시기도 하고, 내가 어머님 옷이랑 이불들을 다 버렸다고 하시기도 하고, 밥도 제대로 안 차려준다며 시누이랑 시이모님들에게 전화로 이르기도 하시고, 병원에서는 수시로 저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한 번 타면 우리집 가는데 나 그냥 집에 갈란다 하시며 엉뚱한 말씀을 하시곤 했다.(병원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없기도 하고, 우리집에 가는 버스도 없다)

평소 없는 일 지어내서 말씀 안 하시고,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라곤 생전 하신 적이 없는 어머님이 왜 있지도 않은 말씀을 자꾸 하실까 싶어서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내 섬망으로 인해 그러신다는 걸 알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한집에서 함께 살아온 세월이 있고,  퇴원하신 뒤로도 계속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기에 한때의 서운함이 마음 속에 오래 자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두>에서 며느리였던 은아는 달랐다.
외아들 외며느리임에도 홀시아버지가 담도암으로 세 번째 병원입원을 할 때까지도 따로 살았고, 퇴원 뒤로 돌아가실 때까지도 따로 살았다.(여름에 퇴원해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다니, 설사 함께 살아봤자 길어야 3~4개월이었으리라. 아들며느리가 모시고 살았으면 더 오래 사셨으려나?)

결혼생활 내내 따로 살아와서 그렇기도 할 테지만 담도암 환자에 20여년째 혼자 살림하며 살아온 시아버지를 끝까지 모시지 않은 건, 섬망이 오면서 보인 시아버지의 언행에 완전 정이 떨어진 탓이 크지 않을까 나 혼자 생각했다.

무학에 맨손으로 상경해 갖은 고생 끝에 가정을 일군 아버지를 혹시나 "많이 배운" 아내가 무시할까 봐 걱정하는 남편 세진, 사람을 학력이나 재산 정도로 판단하는 속물이 아님을 남편에게 입증하고 싶었던 은아. 사랑에서 비롯된 이해가 영원할 것이라 여겼고,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며 24평 아파트와 자기관리에 깔끔했던 시아버지와의 좋은 관계는 시아버지가 담도암을 앓으면서 10년도 안 되어 종지부를 찍었다.(책 내용으로 미루어 담도암을 앓은 기간 역시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암 발병 - 병원 입원과 퇴원 - 죽음이 모두 한 해에 일어난 듯)

간병으로 몸이 지쳐갈 즈음(책엔 정확히 나와있지 않지만 입원 일주일만에 평온한 간병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하는 걸 보면, 아들며느리가 번갈아가며 간병한 지 1주일을 넘긴 시점에서) 하루 24시간 일당이  8만원하는 간병인 황영옥 여사님을 쓰기 시작했다. 간병에 능숙한 베테랑이던 영옥을 시아버지는 처음에 어려워하고 불편해하다 섬망이 오면서는 "도둑년"이라 불렀고, 마지막엔 머리끄뎅이를 붙잡아 드잡이를 해댔다. 행패를 막기 위해 세진과 함께 나섰지만 시아버지의 완력에 밀려났고, 결국 은아가 저도 모르게 시아버지 가슴팍을 확 밀치면서야 이 소동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순간 은아는 힘없고 병든 노인에게 폭력을 가한 젊은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 얼마전에 시아버지에 의해 박사와 결혼하며 열쇠 세 개를 해오지도 않았고, 여지껏 애를 못 낳았으니 "집안에서 가장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며느리였다.

반쯤 혼이 나간 황영옥과 은아는 병원 옥상에서 말없이 담배를 나눠피고, 그날로 황영옥은 세진에 의해 간병일을 그만 두게 된다. 세진은 환자가 영옥씨를 자꾸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함부로 대하니 간병인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말했으나, 누가 봐도 영옥씨가 노여워서 해고하는 것이었다. 묵묵히 간병에 최선을 다하던 황영옥은 그렇게 일을 그만 두게 되었고, 은아는 그런 세진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황영옥이 가고 난 뒤 새로 온 남자 간병인은 하는 일은 별로 없고, 그나마 무성의하고 불성실했다. 그럼에도 남자 간병인은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당은 만 원 더 비싼 9만원이었다. 성심성의껏 돌봐주는 여자간병인보다 불성실한 남자간병인이 더 돈을 많이 받는 걸 보며 돌봄노동에서도 남녀차별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이것도 가부장제의 그늘일까?

가장 놀라운 건 시아버지의 태도였다. 시아버지는 남자간병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고분고분 따르고, 조금 주눅이 든 채 어려워하며(여자간병인은 아무리 잘해줘도 막 대하고. 남자간병인은 어려워하는 시아버지의 태도도 참 어이가 없었다. 섬망중에도 변치않는 뿌리깊은 남녀차별이라니...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것이겠지) 혼자힘으로 수저질을 하려 노력하고,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다 보니 섬망증세가 호전되었고, 다른 증세도 좋아졌다. 그래서 열흘만에 퇴원을 했다.  

퇴원하며 세진은 혹시 병원에서 주고 받은 상처가 있다면 깨끗이 잊자고 했지만, 은아는 병원에서 보낸 그 여름의 한 달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다, 1년도 아니고 겨우 한 달. 그나마도 혼자 오롯이 다 감당한 것도 아니고, 처음 일주일은 남편과 낮밤을 나눠서 하고, 나머지 기간은 상주간병인을 두고서였다. 심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아버지의 소변을 받고 나서는 "죽어라... 죽어.. 콱" 하는 착각도 환청도 아닌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분명 자신의 속에서 나온 소리일 것이다.

사람은 아홉 번을 잘 해도 한 번을 못하면 욕먹는다고 했던가? 시아버지가 그렇게 예뻐해주고 잘해준 세월이 8년을 넘었어도, 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딱 한 달 동안 섬망이 와서 제정신이 아닌 채 나온 말로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모든 것에 정을 떼버렸다. 심지어 빨리 죽어줬으면 한다. 어이가 없는 한편, 아무리 잘해봐야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이해하려 든다면 은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나로선 결혼하고 10년 가까이 시집살이 한 번 없이 살다가 딱 한 달 곁에 있으면서, 시아버지가 섬망중에 나온 말과 행동을 가슴에 깊이 묻어두고 지내다 결국 몇 달 뒤 이혼한 은아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은아는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은 언급을 피한다. 바로 아래 문장처럼.

시아버지는 그해 겨울에 죽었습니다. 어떤 죽음이었는지는 여기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죽음이 세진 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제게도 깨끗이 지우는 게 불가능한 어떤 감정을 안겨주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자두, 115쪽)

두 사람 합의하에 잡음없이 이뤄진 이혼이라고 하긴 했으나, 자신은 며느리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했음에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상처를 입은 세진이 은아는 처음 보는 6촌형을 부여잡고 자기가 나쁜 놈이라며 울부짖는 모습을 본 뒤로 (당숙을 모시지 않았다고 한 마디 하는 6촌형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해주지 않은) 남편을 용서할 수 없어 이혼을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진이 문상 온 친척의 지적질에 정색하며 댓거리하기보다, 아내탓이 아니라 자기가 잘못한 거라고 말하며 울어버린 게 더 현명한 상황수습 아니었을까? 안그랬으면 초상집에서 큰 소리 내며 싸움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큰데 그 와중에 아내의 자존심을 먼저 지켜주길 바라는 은아의 이기심에 쯧쯧 혀를 차게 된다.

게다가 그 장례식장에 간병인 황영옥이 와야 할 것 같아 늦은 시간 무작정 병원에 올라가 그녀를 찾아 만나려했던 부분에선 실소가 지어진다. 도대체 1주일 정도밖에 일하지 않은 그 간병인이 어떤 이유로 시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정말 황영옥에게 시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다면 무작정 병원으로 찾아갈 게 아니라 전화를 하면 되지...(간병인 연락처 정도는 필수로 갖고 있지 않나? 급한 일 생기면 보호자와 연락을 해야 하니까. 설마 간병인이 바뀌면서 연락처를 지웠나? 그렇다면 더 웃기는 상황이다)

은아가 이혼 후 갑자기 눈이 보고 싶어 떠난 일본 북해도 여행에서 주소도 모르는 황영옥에게 뜬금없이 "영옥씨,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라고 딱 한 줄 쓴 엽서를 보내는 것도 다분히 감상적이다. 작가는 번역일을 하는 지식노동자 은아가 잠깐의 돌봄노동을 겪으면서 돌봄노동자로 살아가는 황영옥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누가 오해하거나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작 이 엽서를 받아볼 황영옥은 얼마나 황당할까 싶다.
"일본여행 다니는 중에 문득 당신 생각이 났어요. 당신은 오늘도 일하는 날일 텐데, 어떻게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누구 약올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이 힘들 때 옆에 있어준 황영옥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면, 시아버지 간병해주시는 동안 고마웠다고, 힘이 되었다고 몇 줄 더 썼으면 될 일을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꼭 긴 시간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병원에서 보낸 한 달로 8년 넘게 보아온 시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단호히 부정하고, 돌봄노동을 함께 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주일 가량 겪어본 간병인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혼자 오버하는<자두> 속 주인공 은아를 나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주혜 작가가 실제로 번역을 한 책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저자 에이드리언 리치가 엘리자 비숍을 만나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길에 둘만의 대화에 빠져 하트퍼드 분기점을 지나 스프링필드까지 내처 가버린 시간동안 단둘이 보낸 단 한 번의 친밀한 시간과  은아와 황영옥이 병원 옥상에서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나눠 핀 시간을 짧지만 서로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연장선으로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걸 알지만 이 소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했다.

황영옥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은아는 어떻게 영옥을 이해했을까? 황영옥 개인의 불행한 과거기억은 소설 속에서 단지 독자의 이해를 거들기 위해 한 챕터 나왔을 뿐이다. 이런 영옥의 속사정도 모르는 은아가 보인 행동은 그저 자신만의 생각과 감상에서 비롯한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위로의 모습일 뿐이라 여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