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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20. 2023

아름다운책, 긴긴밤

제 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루리의 <긴긴밤>을 138쪽의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오래오래 읽었다. 책이 주는 감동을 훼손할까 염려해 부러 길게 리뷰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은 내용을 꼼꼼히 짚어보고 싶어서 책을 다시 차근차근 한 장씩 넘겨가며 내 안에서 정리해 길게 써본다.


우리나라 아동문학사에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나온 사실에 감탄하며(처음엔 작가 이름도 외국스럽고, 책의 수준도 무척 높아서 외국작품인 줄 알았다) 미술이론을 공부했기에 이다지도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었나 싶은 루리 작가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긴긴밤>은 2021년 2월에 나온 책인데, 최근 들어 주변에서 이 책을 추천하는 이들이 두 명이나 있어서 2년 지나서야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었다. 읽는 내내, 책을 이끌어가는 화자가 누구인가 궁금했다. 처음엔 주인공 코뿔소 '노든'을 돌보게 된 사육사가 아닌가 했다. 아니었다. 중간 이후에 윔보와 치쿠의 알에서 깨어난 아기 펭귄이었다. 이 펭귄은 이름이 없다.


파라다이스동물원의 펭귄 우리에 버려진 알. 하얗고 깨끗한 알이 아니라 검은 반점이 있어 아무도 품지 않으려 했던 알을 윔보와 치쿠 두 친구가 번갈아가며 품었고, 전쟁통에 윔보가 죽자 치쿠가 노든과 함께 피난길을 떠나면서 양동이에 담아갔던 알에서 깨어난 펭귄.


이 펭귄의 탄생이 버려진 알을 지극히 돌본 두 아빠 펭귄의 사랑 덕분에 가능했다면, 코뿔소 노든 역시 코끼리고아원에서 수많은 다른 코끼리들의 보살핌으로 길러졌다. 거의 모든 일에 코를 사용하는 코끼리들의 긴 코가 노든을 돌봤다. 그저 자신이 어려서 아직 긴 코도, 펄럭이는 귀도 덜 자라서 그런 줄 알았던 노든은 코와 귀 대신 뿔이 자란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어린 코끼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코끼리고아원에서 코뿔소 노든은 평화롭게 지낸다. 돌이켜보면 노든의 삶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고아원 밖으로 나가 살 것이냐, 평생 이곳에서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노든은 할머니 코끼리의 조언처럼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기에 바깥세상으로 나온다.        


책 속에는 마음에 콕 들어와 박히는 좋은 문장들이 꽤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내가 꼽은 첫번째 문장이 나온다.


- 나는 언젠가 노든에게 그때 고아원을 나오기로 한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더. 그때 바깥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 18쪽


후회를 통해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후회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태도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일을 꼽을 수 있는 당당한 삶의 자세를 나도 배우고 싶었다.


노든은 바깥세상에서 대자연의 풍경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코끼리가 아닌 진정한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어느날 운명처럼 아내 코뿔소를 만나게 된다. 아내와 딸과 상상 이상의 행복한 삶을 살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코뿔소의 뿔을 탐하는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해   아내와 딸을 잃고, 노든은 깊이 상처를 입은 채로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리고나서 가게 된 파라다이스 동물원에서 '노든'이란 이름을 얻고, '앙가부'라는 코뿔소를 만난다.


오로지 인간에 대한 복수심만 키우던 노든은 앙가부와 대화를 나누며 동물원의 생활규칙을 알게 되고,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탈출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하고, 코뿔소 울타리는 더욱 튼튼한 새것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뒤 앙가부가 절대 실패하지 않을 탈출계획을 세웠지만, 탈출시도 하루 전에 동물원에 몰래 숨어든 뿔 사냥꾼에 의해 앙가부는 뿔이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노든은 뿔 사냥꾼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동물원에서 부러 뿔을 자른다. 코뿔소 뿔은 적당히 잘라 내기만 하면 다시 자라니까. 그리고 노든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되었다.


노든이 이렇게 동물원에 갇혀 고군분투하는 동안 동물원의 펭귄우리에 살던 두 마리 펭귄 윔보와 치쿠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컷인 이 펭귄들은 둘다 동물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다. 정어리뼈를 가지고 놀다 오른쪽 눈을 다친 뒤로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이는 치쿠를 위해 윔보는 늘 치쿠의 오른쪽에 있으며 중심을 잡거나, 방향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버려진 점박이알을 함께 품는다.


알을 품으며 오만가지 걱정을 하던 그들에게 얼마 뒤 전쟁이 떨어지면서, 치쿠의 오른쪽에 있던 윔보는 전쟁통에 일어난 폭격으로 무너진 커다란 철봉에 깔리고 만다. 윔보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아직 부화하지 못한 알을 구출하기 위해 치쿠는 윔보와 제대로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눈만 마주치고 동물원을 나선다. 그 피난길에서 알이 든 양동이를 입에 문 치쿠는 폭격으로 무너진 우리를 빠져나온 노든을 만나게 된다. 그날밤 둘은 잠들지 못했고, 그뒤로도 그들에게 긴긴밤은 계속 되었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잠잘 곳을 찾기 위해, 무엇보다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 살기 위해 무조건 걸어야 했던 치쿠와 노든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정처없는 행군을 견뎠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우리'가 되었다.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 코끼리 코딱지만 한 펭귄이라고 서로를 부르며. 정말 불만이 많은 치쿠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걷고 있으면, 이 모든 하루하루가 평범하게 여겨진다고 느끼며.  


목소리만 들어도 배가 고픈지 아닌지, 발소리만 들어도 더 빨리 걷고 싶은지  쉬고 싶은지 가늠할 정도로 노든과 치쿠가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었을 무렵 치쿠는 혹시 나한테 일이 생기면 알을 돌봐주라고, 그 알에서 새끼 펭귄이 태어나면 꼭 바다에 데려다주라고 노든에게 당부한 뒤 푹신한 수풀에 곤한 몸을 누이고 쉬다가 알을 품은 채 죽는다.

  

치쿠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노든은 알의 온기를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쓰다가 앞발을 모아 알을 감싸고 외롭고 긴긴밤을 보낸 다음날 새끼 펭귄인 '나'가 태어난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노든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펭귄에 대해 아는 거라곤 치쿠에게 들은 게 전부인지라 펭귄의 삶을 잘 몰랐지만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 노든은 치쿠와 윔보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그들 덕분에 살아남았으니,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치쿠와 윔보의 몫까지 살기 위해 살아 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냈다고 말한다. 그들의 몫까지 산다는 노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라고.


노든이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던 나는 커다란 노든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좋았고, 노든 옆에서 마음이 놓였다. 바다에 도착하면 거기서부터는 너 혼자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노든은 나를 바다로 데리고 가려고 바다가 있을만한 곳을 향해 매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두번째 기억에 남는 문장.

중간에 다른 문장들이 있지만 편집해서 쓴다.


- 노든이 나와 같이 바다에 가고 싶어 한다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해 왔지, 절망을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노든은 계속 인간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말없이 긴긴밤을 넘기고 있었다. 적막을 깨고 별안간 노든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 봐." - 87~88쪽


치쿠와 나에겐 커다랗고 든든한 코뿔소가 옆에 있어서 좋았고, 노든은 쉼없이 재잘대며 자신의 불행을 잊게 해준 동행자가 있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많이 달라도 긴 시간 함께 걸을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방적인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개 해준다.



처음으로 자신이 수영을 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호숫가 모래밭에 누워 잘 익은 망고열매 색으로 물들고 있는 하늘을 행복하게 바라보던 노든과 나는 얼마 뒤 가장 많은 비가 내렸던 날 인간의 습격을 받게 된다.


긴긴밤을 넘어 겨우 살아남은 그들은 바다를 향해 계속 걷는 동안 또다시 인간들을 만났지만 긴긴밤 덕분에 더이상 어리석게 인간들을 뿔로 들이받으며 온통 쑥대밭으로 만드는 대신 인간들이 잠든 틈을 타서 조용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모래언덕 뒤의 높은 절벽만 넘어가면 바다가 있을 것같은 그곳에서 노든은 몸이 아파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인간들에 의해 발견되어 초원의 어딘가로 옮겨진다.


노든이 실린 트럭에 몰래 들어가 초원까지 따라온 나는 노든이 여기에 남겠다고, 하지먼 너는 네 바다를 찾으러 가라는 말을 듣고 혼자서 바다를 찾아 나선다.

펭귄이 아닌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노든 옆에  있겠다고 우기지만, 노든은 말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노든이 코끼리고아원에서 세상 밖으로 나갈까 말까 고민할 때 할머니코끼리가 해준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홀로 길을 나선 나는 나의 바다를 찾아 떠난다. 그리고 노든과 함께 바라봤던 모래언덕 너머 절벽 위에 올라가 파란 지평선을 마주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파란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세상에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아직 죽지 않은 친구를 뒤로 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치쿠의 심정을,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로 이 순간 노든이 오래전 나에게 윔보와 치쿠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뜻을 이해한 것이리라.    


바다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것이고,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야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 코와 부리를 맞대고 인사할지도 모를 그 날을 기다리며.


글이 끝나고 이어진 아름다운 그림들을 오래오래 쳐다보다 책장을 덮고나면 가슴 벅차게 떠오르는 생각들. 우리가 우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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