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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24. 2023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 가

학교 보건실 이야기

올해는 뜻밖에도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됐네요.

새벽까지도 말끔하던 하늘에서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세상을 하얗게 덮었답니다. 기온은 어제보다 올라서 눈이 왔어도 오히려 더 따스해진 느낌이에요. 그래도 춥긴 춥습니다만^^;;


이렇게 추운 날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책이 있어 소개해봅니다. 학교에서 20년간 보건교사로 근무한 김하준 선생님의 보건실 이야기입니다.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면서도 잘 몰랐던 보건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책을 읽고 나서,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보건실을 찾는다는 사실과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아이들도 다른 핑계를 대고 보건실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아이들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답니다. 지금은 성인이 된 딸과 고3인 아들에게 초등학교 다닐 때 보건실 자주 갔냐고 물어보니, 거의 안 갔다고 해서 '휴~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니,

내 아이들이 보건실에 잘 가지 않은 이유는 워낙에 아프지않는 건강체이거나, 학교에서 다치는 일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아이들이 집에서 아프면 바로 병원에 데려갔다가 상태가 나아진 뒤에야 학교에 보냈고, 학교에서 아프거나 다친 경우 선생님이 연락을 하시면 바로 내가 데리러 갈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을 보면, 부모가 바로바로 신경써주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프거나 다치면 보건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더라구요. 책에는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이유로 많은 아이들이 보건실을 찾는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보건실에 아이들이 얼마나 갈까 싶고, 누군가는 밴드나 붙여주면 되는 '꿀직업'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정작 보건실은 엄청 바쁘답니다. 하루 평균 50명의 아이들이 드나든다고 해요. 보건실의 하루를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정리한 일지형식의 글을 보니, 혼자서 그 많은 일들을 하신다는 게 눈으로만 봐도 숨이 차고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어느 비오는 금요일(비가 오고, 학교가 일찍 끝나는 금요일에는 비교적 보건실을 찾는 아이가 적다고 ) 하루 일지에는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59번째 아이가 오고, 방과후에 60번째 아이가 한겨울에 양말도 신지 않고 아프다며 찾아더라구요.


울음이 그치고 상처가 아무는 곳, 보건실.

그곳을 혼자서 지키며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야했던 김하준선생님은 지치지 않고 아이들을 좀더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업무로서의 보건일지가 아닌,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까지 기록하는 특별한 보건일지를 쓰는 일이었지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여기저기 상처를 입으며 자랍니다. 처음 겪어보는 아픔에 놀라 울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웃으며 뛰어다니는 게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아파하는 아이들도 보건실에 꽤 많이 찾아온다고 해요.   


보건실을 찾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시처럼 써놓은 글에 등장하는 미희가 그렇습니다. (글 속의 아이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 미희 >


머리

다리

어깨

허리

손가락

무릎

종아리


실은 '마음'이 아픈 거였는데

'마음'이라고 쓰는 데까지

1년이 걸린 아이


-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 가>  中에서


마음의 상처는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없지만 그 작은 관심만으로도 금세 회복되는 유연함을 가진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일이 단지 겉으로 드러난 아이들의 상처만 돌보는 게 아니라, 속에 감추어진 아픔과 슬픔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교실보다 보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 졸업하는 아영이를 보면서 상담실과 보건실 사이, 아영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인력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피력하기도 합니다.


김하준선생님은 흙이 부족하거나 당장 옮겨 심을 화분이 없을 때, 그 식물의 뿌리에 붙은 흙을 씻어내고 물에 담아 키우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뿌리가 길어지면서 잔뿌리가 자라난다고 해요. 이처럼 흙이 너무 부족해 차라리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만 하는, 유년기에 마땅히 제공되어야 할 충분한 흙과 양분이 부족한 아이들이 어요.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가 유리병과 깨끗한 물이 되어주면, 보건실은 물의 혼탁함을 관찰해 뿌리가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살펴 보는 곳이 되지 않을까? 하며 학교와 보건실이 어린이들에게 더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보건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어린 시절 상처의 경험을 지닌 자신의 '내면아이'를 위로해줄 수 있었기에 보건실에 찾아오는 아이들을 좀 더 다정히 들여다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고, 그것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김하준선생님.


소아당뇨병으로 저혈당과 고혈당을 반복하며 보건실을 2년간 거의 매일 드나들던 승수가 혈당이 높아져 스스로 인슐린을 주사하던 날,

"선생님, 세종대왕은 당뇨로 죽은 거래요. 그래서 당뇨는 부지런하게 하는 병이래요. 내가 축구를 진짜 잘해서 축구 공을 뻥 차면 그게 우주까지 날아가서, 별똥별인 줄 알고 저처럼 아픈 아이들이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소원은 발끝에서 이루어진대요." 하는 아이의 말과 표정에서 슬픔을 딛고 피어나는 희망을 읽기도 합니다.


어느날 나무에서 떨어진 채 꼼짝 않고 있는 새끼 직박구리를 한 아이가 주워다 보건실에 맡겼는데, 직박구리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문을 다 열어줬는데도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했어요. 그 새는 열린 문이 모두 아래에 있는데도 위로만 날려고 했어요. 수십 번 부딪치며 날갯짓을 멈추지 않다가 힘이 다 빠져서 창문가에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새는 그제야 자기 앞에 있는 낮은 창문을 발견하고, 작은 창문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시원스레 날아갔답니다. 그 새를 보며 선생님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하지 말아야지, 지칠 때 다시 날아갈 힘을 얻으려면 높이 날려고 하지 말아야지, 앞만 보고 돌진하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을 했다고 해요. 보건교사로 일하며 가끔 마음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감당하기 힘들 때, 자신을 향해 돌아앉아 울었던 새끼 직박구리의 울음을 떠올릴 것이라고.


읽다 보면,

은근 재미도 있고, 깊은 감동도 있고, 아~ 하는 깨달음도 얻게 되는 책이에요.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코로나19 이전의 일들이고 현재 보건실에서 아이들을 보는 방법고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일정한 물리적 거리를 두고 대해야 할지라도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바람이 따듯하게 다가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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