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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Feb 28. 202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감정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게 해주는 책

2023년 8월 7일 독자와 함께 성장해나가는 우리 세대의 소설가' 최은영이 데뷔 10년을 맞아 펴낸 세번째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나오자, 책 좀 읽는다는 분들이 앞다퉈 이 책을 읽고 든 생각들을 밝혔다.



7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는 이 소설집은 각각의 소설이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문제의식을 던진다. 일곱 개의 희미한 빛이 만들어내는 광경은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들어, '저 사람, 아프겠다'하는 관찰적 독자 시점이 '아, 고통스럽다'의 참여적 관계자 시점으로 변화된다.
 
7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으로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많이들 꼽지만 나는 <일 년>이다. 이 소설을 보며, 그간 말로 규정되지 않아 모호했던 내 감정과 생각들이 확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마음을 의심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괜찮은지, 좋다고 말했지만 좋기만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경계를 허물어준 다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숨김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다희의 마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추한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도 몰랐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들 탓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자기 자신조차 설득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최은영 작가의 능력과 관찰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조 작가의 사회로 진행된 한 북콘서트에서 말하길, 최은영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슬픔이 많은 사람이었단다. 그걸 참고 회피하려다 보니 디스크도 터지고 위도 안 좋아지는 등 건강을 해치고 급기야 30대 중반엔 눈물이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부터 다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제대로 우는 법을 배운 작가는 오랜 시간 자신이 가진 슬픔을 갈고 닦으며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워낙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다루는 작가인 최은영은 작품을 쓸 때 자신은 혼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끊임없이 고치는 성실한 작가라서 단편을 장편으로 발전시킬 생각이 드는 경우는 전혀 없다고 한다. 이미 뺄 게 없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썼기 때문에. 햐~ 이런 말을 당당히 하다니, 참 멋지다!

살아가는 삶에 대한 관찰이 잘 되어있는 소설에 공감하면, 실제 생활에서도 그 소설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작품 <일 년>도 그렇게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칠 듯하다. 사람에 따라 소설책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인생책으로 언급한 이유는 이때문이 아닐까?

말그미의 책레시피

사람이 지닌 감정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은 분이라면, 관대하지 못했던 나, 잔인했던 나, 제대로 소리치지 못했던 나, 벌을 주듯 폭음하던 나, 타인을 마음의 법정에 세운 나를 직시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 단편 "일 년"에 나온 기억하고픈 내용들

1. 아니에요.  죄송해요.
괜찮으니 마음놓아요. 전 좋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마음을 의심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괜찮은지, 좋다고 말했지만 좋기만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경계를 허물어준 다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숨김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다희의 마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2. 그렇게 매일 두 시간 남짓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동안 그녀와 다희는 선후배도, 친구도, 애인도,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려 일터로 가면 동료가 되었다가, 다시 차에 올라타면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유일하게 대화가 끊기는 순간은 인안대교를 건널 때였다.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진입하면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멈추거나 대교가 보일 무렵이면 대화를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며 그녀의 마음은 두 갈래로 갈렸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자신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과 다희와 계속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희와 이야기할 때면 따뜻한 바닷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물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3. 남자애 엄마가 저한테 필통을 돌려주고 떠나면서, 어쩜 노인네가 저렇게 못되게 늙었대? 그러더라고요. 벌레 보듯이 쳐다보면서. 그랬더니 할머니가 이러는 거예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늙었다. 왜! 이...... 씨발년아.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때 할머니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말로 일격을 가하고 싶으면서도 겁먹은 게 제 눈에는 보였거든요. 씨발년아, 라고 할 때는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꼭 울 것 같았어요. 욕도 못하는 사람이 최대치의 욕을 한 거죠.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기억이 자주 떠올라요. 저를 지키려는 매 순간순간이 무서웠을 것 같고, 용기를 냈어야 했을 것 같고, 세상 소심한 사람이 막, 씨발년이라는 말도 해야 했고.

선배.
......
말해줘서 고마워요.

4. 열한시에 시작해서 열두시에 끝나야 했을 행사가 열두시 반에도 끝나지 않았다. 주요 임원들이 차례로 나와서 감상을 말했는데, 대체로 얘기가 길어졌다. 마이크가 잘 되지 않을 때면 이거 왜 이래? 라고 직원들이 있는 쪽을 보고 반말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쩔쩔매는 직원들 사이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소리치거나 반말을 섞어 쓰는 사람들을 그녀는 자주 보았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그녀를 피로하게 한 건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무의미하고 진부한 말들이었다. 현재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자랑하는 말들.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다 드러낼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생각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자기 특권을 과시하는 사람들.


5.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진입하자 다희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점점이 보이는 작은 빛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멀리까지 이어진 대교의 불빛에 시선을 두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은근한 따돌림이 있었을 때도 동료들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아침이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서 만나면 반가운 내색을 했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 공적인 일에서 그녀를 배제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몇몇 분명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두가 받은 동료의 청첩장을 받지 못했을 때, 탕비실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질 때, 아주 사소한 주제라도 그녀와는 사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려는 기미가 느껴질 때, 어떤 말도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어서 버겁고 불편하다는 분위기가 감돌 때, 우리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당신을 나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도울 생각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 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나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 자며 아침을 맞았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을 하고는 환한 대낮의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6. 입사한 지 일년 정도 됐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김상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지수씨 같은 신입은 억울할 거야. 고졸 특채들이랑 같이 신입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들어왔으니.

그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겉으로야 같은 입사 동기지만 다 형식적인 거고, 우린 걔네 후배로 생각 안 해. 그러니까 걱정 마요.

그가 내리고, 그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예전이었다면 김상무의 그런 말에 억지로라도 웃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그녀는 분명 안도했고, 그런 식으로라도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는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한 그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거울에서 그녀가 본 건 기쁨과 안도가 스민 진짜 웃음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추한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도 몰랐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들 탓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자기 자신조차 설득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다희에게 말하지 못했다.

7. 알았어요. 앞으론 그냥 갈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 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희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다희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녀는 다희의 집 근처에 와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오늘 피곤해서......
다희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희와 함께 출근하던 마지막 한 달 동안, 둘은 그날 일을 입에 올리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화했다. 그것이 그녀는 슬펐는데, 다희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8. 많이 아팠나요, 다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한 지 꽤 돼서, 이젠 괜찮아요.
남 얘기하듯 말하는 건 여전하네요. 이런 일에도 선밴 그저 담담하기만 해요.
그런가요.
이런 일에도 아프다고 안 하면 선밴 언제 아프다고 해요?

모른다는 말을 하려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곧 나으리라고, 회복되리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 지나갈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조금만 참아. 의사 말대로 해. 다 끝날 거야.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아서였을 까.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아프냐고 묻지 못한 것이었을까.

많이 아팠나요, 다희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다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9. 다희도 그녀도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다. 퇴원하던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안방 창가에 서서 내리는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창에 달라붙은 눈은 금세 작은 물방울이 되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눈은 지상의 사물들을 흰빛으로 덮었다.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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