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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05. 2020

은목서향에 취해볼까나?!

순천 조계산 선암사

※ 긴 글 주의 ※


얼마 전 한 지인께서 달콤한 향기가 정원에 가득하다고 자랑을 하셨다.

'물푸레나무과'의 은목서는 자연적으로 둥글게 되는 수형도 예쁘고, 그리 크게 자라지도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원에 한 그루 심어볼 만한 나무인데, 꽃부리가 4개로 갈라지는 꽃은 5mm 정도로 자잘하지만 정말 향기롭단다.

어찌나 향이 짙은지 멀리서도 은목서 꽃이 피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어떤 꽃도 은목서 꽃향기를 따라올 수가 없다고 한다. 등황색의 꽃이 피는 ‘금목서’ 향기가 더 좋지만, 금목서는 추위에 너무 약해서 그 분이 살고 계시는 김천에서는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이라 은목서 향기만으로도 당분간은 행복할 거라고 하셨다.

은목서 향기에 대해 어찌나 조근조근 글을 잘 풀어내셨던지 도대체 어떤 향이 나는 꽃일까 몹시 궁금했더랬다. 그런데 한글날 연휴를 맞아 순천 선암사에 갔다가 은목서 향기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선암사는 2009년 12월에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사찰(해남 대흥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조계산은 순천시 송광면과 승주읍에 걸쳐 있으며, 장군봉을 주봉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수림이 울창하다. 특히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고 있어, 명산 명찰의 기운이 산 전체를 타고 흐르는 대한민국 100대 명산이다.

선암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몇 개의 이야기가 전한다. 529년(신라 진흥왕 3)에 아도화상이 처음으로 개산하여 고청량산 해천사라고 했다는 설과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827∼898)가 호남을 비보하는 비보사찰로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529년(백제 성왕 7)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742년(경덕왕 원년)에 도선이 재건하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신라에 한창 불법을 전하던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어느새 이웃나라인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도선국사의 생몰년도에 따르면 742년은 태어나지도 않은 때이니, 875년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이 설을 뒷받침하듯이 선암사엔 선각국사 도선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한데 선암사 신문에 보면 1500년 고찰임을 내세우고 있으니, 선암사측은 아도화상이 529년에 비로암이란 작은 암자를 세운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 여기는 듯하다.

이후 고려중기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비록 그 제작 연대에 의혹이 있기는 하나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법당이 13개, 전과 사가 12개, 요방이 26개, 암자가 19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전라도 사찰들은 왜군의 침략으로 거의 불에 타거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때 선암사도 불에 타 초토화되었다. 철불 1기, 보탑 2기, 부도 3기와 문수전, 뒷간, 조계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조리 불에 타버려 흔적조차 없어졌다. 이랬던 것을 조선 숙종 때 호암이 선암사를 중창하면서, 전각의 수리와 함께 승선교를 축조하는 등 사찰을 정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 등의 불사를 통해 옛 사찰의 모습을 되찾고, 사찰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가장 한국적인 사찰이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천 오백 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산사’의 모범답안처럼 청정하게 잘 관리된 사찰이자, 사시사철이 아름답지만 꽃으로 유명한 절답게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봄이 되면 절 곳곳에는 벚꽃을 비롯해 목련·모란·앵두·모과·철쭉·영산홍·동백·상사화·옥잠화·치자·파초·부용 등 갖가지 꽃들이 잇달아 피어나는데 그중에서도 선암매가 유명하다.

원통전 뒤편과 각황전 옆담에는 수령이 350~650년에 이르는 오래된 매화나무 50여 그루가 있는데, 3월 말경에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어 이 매화나무들을 '선암매'라고 부른다. 구례 화엄사에 홍매(흑매)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잇듯, 순천 선암사에는 선암매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조계산 자락을 찾는다.

가을 초입에야 선암사를 찾은 나는 선암매는 볼 수 없었지만 그보다 멋진 꽃나무를 만났다.

승선교와 강선루를 지나 타원형 연못 '삼인당'을 돌아서 일주문을 향해 가는 오르막길에서 문득 향긋한 꽃향기가 숲길 가득 번지며 마스크 속 콧구멍을 간질였다. 무슨 향이 이렇게 좋은 걸까?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조팝꽃처럼 조롱조롱 하얀 꽃을 단 꽃나무가 길가에 쭉 늘어섰고, 그 꽃에서 나는 향 같았다. 왠지 느낌상 은목서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은목서로 검색해서 나뭇잎과 꽃모양을 비교해보니 바로 맞았다!

은목서꽃이 이렇게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는구나~ 은은하면서도 깊이 있고, 조향사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낸 향수인듯 하면서도 자연의 상큼함을 지닌 향기였다. 은목서 향기에 취해 은목서 나무 아래에 서서 한동안 향기를 맡았다. 남편이 여기서 시간 다 보낼거냐며 그만 가자고 채근하는 바람에 아쉬운 발걸음을 선암사 경내로 옮겨 들어가보니...

세상에나~~~! 선암사 곳곳에 커다랗고 둥근 모습의 은목서 나무가 하얀 꽃을 눈처럼 바닥에 흩뿌리며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날 선암사를 찾은 많은 탐방객들이 이 좋은 향이 뭐냐고 하면서 코를 벌름대며 향기의 근원을 찾아헤맸고, 난 꽃에 일가견이 있으신 페친 덕분에 은목서 향기라고 당당히 일러주었다. (중간중간 커다란 은행나무가 응가를 푸지게 퍼질러놔서 똥냄새도 바람결에 맡긴 했으나 은목서 향기가 압도적이었다. 대체로 은행나무는 사찰 바깥쪽에 한두 그루씩 서있었고, 은목서나무는 사찰 안쪽에 두루 두루 자리잡고 있다)


경내에 가득한 은목서 향기를 행복하게 맡으며 돌아본 선암사는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정결한 느낌이 들었고, 그리 넓어보이거나 커보이지 않는데도 수많은 전각들이 쭉 배치되어 있어 놀랐다. 경내 배치도를 보지 않고 다니면 놓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종무소에서 선암사 설명서를 구하고, 응진당 영역의 문각 오른쪽에 있는 가람배치도를 보면서 경내를 한 번 더 돌았다. 은목서향기를 더 오래 맡고 싶은 욕심이 사실은 더 컸다.^^

선암사는 꽃도 많지만 보물과 문화재도 많다.
보물인 승선교(400호), 대웅전(1311호), 동.서 삼층석탑(385호), 대각암 승탑(1117호), 북승탑(1184호), 동승탑(1185호) 6점과 전라남도 지정 유형 문화재인 원통전(169호), 일주문(96호), 팔상전(60호), 중수비(92호), 금동향로(20호) 5점을 비롯해 도기념물 64호 삼인당, 도문화재자료 214호 뒷간, 천연기념물 488호 선암매, 도문화재자료 157호 마애여래입상과 우수한 부도 2기가 경내에 있다. 특히 조선 후기의 특성을 간직한 사자탑인 화산대사 사리탑이 유명하다.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 등 약 1천 8백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선암사에는 1753년 제작되어 국내 최고로 꼽히는 괘불을 비롯해 영조 41년(1765년)에 제작된 대웅전 〈영산회상도〉 등 선암사 전각 곳곳에 아름다운 불화가 많다. 이러한 괘불이나 대웅전 후불탱화 및 나한전 후불탱화는 대부분 쾌윤거사(조선 숙종 때)의 그림 솜씨이다. 쾌윤은 호암대사의 스승인 침굉 스님으로부터 그림을 배웠으며, 불화 그리는 오른손을 베로 싸고 다니다가 그림 그릴 때만 풀었다고 한다.

보물 400호로 지정된 승선교는 금강산 장안사 입구의 비홍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무지개 돌다리다. 홍예뿐만 아니라 석축까지 시멘트보강 없이 자연석들을 쌓아 자연미를 살렸다고 한다.(홍예란 중국에서 무지개가 된다고 여겨졌던 용의 일종으로 무지개처럼 휘어 반원형의 꼴로 쌓은 구조물을 이른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사진이 바로 이 승선교 아래 강선루가 보이는 풍경이다. 가을이 깊어 단풍이 곱게 들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승선교로 가는 길의 왼쪽에 왠 돌무더기가 줄지어있는데, 이는 승선교 보수 중에 더이상 쓸 수 없게 된 기존의 오래된 돌덩이들을 모아서 전시해둔 것이라고 한다.

강선루를 지나 전통찻집 선각당 앞에 있는 삼인당은 기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 알 모양의 섬이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 연못은 불교의 삼인을 구현해 놓은 것이라지만 선객이나 일반인이 산중에 출입할 때 마음을 가다듬는 상징적 역할이 크다. 가운데 놓인 섬으로 인해 연못이 훨씬 크게 보인다.​

여름 홍수에는 갑자기 불어난 물줄기를 휘돌아 감아 저장하는 과정에서 수위의 완급을 조절하는 역할도 담당한단다. 연못은 최근에 단장됐지만 연못 터는 도선국사가 만들었다는 설에 걸맞게 연못 주위로 수십 척 높이의 삼나무와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도열해 있다.

선암사의 밀도 있는 가람 배치는 독특한 사찰 건축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과 더불어 작지만 단아한 한국미의 전형을 보여주는 선암사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루 아래 대웅전 영역에 진입한다.

선암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주축 이외에 여러 개의 축을 두어 각 영역군을 형성한다. 중심 영역인 대웅전 뒤쪽으로 원통전과 응진전, 각황전 영역이 있으며, 요사채와 부속 건물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지붕과 지붕이 줄지어 연결되어 장관을 이룬다.

선암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찰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순조 25년(1825년)에 중창됐다는 기록이 있다. 선암사는 언뜻 보아서는 전각 가운데 대웅전이 가장 크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그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대웅전은 바닥 면적이 41평에 지나지 않고, 선암사에는 100평 정도 되는 건물만도 모두 6개나 된다고 한다. 대표적인 건물인 심검당이나 무량수각도 겉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크다는 느낌이 안 든다. 오히려 대웅전이 훨씬 커 보인다. 이런 착시현상의 이유는 다른 전각들은 모두 4면이 드러나지 않지만 대웅전은 4면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중 사찰에서 부족한 공간에 많은 전각을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선인들의 지혜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 2 기가 있고, 또 하나 눈에 띄는 문화재가 괘불지주이다. 괘불을 높이 내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인 이 괘불지주가 보통은 2~4 개 정도만 보이는데 선암사 대웅전 앞에는 8개나 있었다. 이것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12.15m)이다. 선암사 괘불은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 면 가득 차게 그려진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벽화 뒤쪽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렸다고 한다.

대웅전 맞은편 만세루에선 스님들의 수업이 진행중이었는데 다들 마스크 쓰시고 열심히 공부중이신데, 유독 눈에 잘 띄는 바깥쪽 가운데 앉은 한 분만 마스크도 안 쓰고 불량한 자세로 자꾸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 웃음이 났다.^^

대웅전 영역을 둘러보는 동안 수업이 끝나서 만세루 안에 들어가 선암사 전 방장이셨던 혜초대종사의 사리 71과를 친견했다. (10.13.이 49재라 그때까지만 전시된다고 한다)
 
고색미 찬연한 선암사 전각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응진당 뒤에 숨은 듯이 자리한 작고 아담한 산신각이 인상적이었다. 혹시 산신각을 모르고 지나칠까봐 친절한 안내문까지 있을만큼 이렇게 작은 산신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참배를 하려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아주 겸허한 자세만을 허락하는 산신각이다.

응진당 오른쪽의 진영각은 선암사의 창건, 중창주와 크게 깨달은 큰스님들의 진영을 모셔놓은 곳이다. 도선국사, 대각국사, 침광현변,백암성총, 호암약휴를 비롯 경운원기 선곡지우스님 등 수많은 고승대덕들의 진영을 볼 수 있다.

무우전 뒤편에 자리한 각황전도 숨어있는 전각으로 무우전 부엌을 통해서 가거나, 왼쪽으로 난 작은 쪽문을 들어가야 볼 수 있다. 무우전은 현재 태고종정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고, 각황전에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철불이 모셔져있다. 선암사는 1불 2탑 3부도로 알려졌는데, 이중 1불이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이다. 정유재란 때 크게 손상되어 보수하였고, 1991년 한지와 삼베를 뜯어내고 점토 위에 개금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불조전과 팔상전 사이에서 어깨동무를 하듯 이어진 독특한 형태의 원통전에는 재미난 일화들이 서려 있다. 숙종 때 호암대사가 중창 불사를 위해 대장군봉의 배바위에서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바위 밑으로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 위에 올려놓으면서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전(관음전)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한편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의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전에 걸려 있다. 그래서 원통전을 '대복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에 순조가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이 보관하고 있어 원통전 안에서는 볼 수 없다.(원통전 앞의 설명서만 믿고 이거 찾느라 한참동안 원통전을 헤맸음 ㅜㅜ)

원통전의 뒤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는데 안타깝게도 놓쳤다.

선암사에서 독특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대각암 가는 길의 해천당 옆에 자리잡은 뒷간이 그것이다. 입구에 ‘뒷간 ’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읽어 ‘깐뒤’로 애교스럽게 불리기도 한단다. 크고 깊은데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으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丁자형의 이 뒷간이야말로 단아한 선암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바닥의 짜임도 우수하고 내부를 남녀 구분한 것이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 가장 안쪽에 앉아 벽면을 보면, 바깥 숲속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의 아랫부분에 살창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살창은 환기구 역할도 한다. 뒷간에 들어가서 한참을 둘러보는데도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아 신기했다. 살창 외에도 변기주변에 냄새를 잡아주는 벼껍질인 왕겨가 뿌려져있고, 뒷간 뒤편 아래에 커다란 통기창을 열어둔 덕분이었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을 최근 새로 짓다시피 보수하였다는데, 본래 ‘뒷간 ’의 장점을 잘 살린 채로 보수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꼽힌다.

선암사에서 은목서 다음으로 인상적인 나무가 가지를 옆으로 구불구불 편 600년 된 와송과 불조전 왼쪽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측백나무 두 그루였다. 처음엔 편백나무인 줄 알았는데 종무소 직원 말씀이 측백나무라고. 두 그루 측백나무가 어찌나 멋진지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출사 나오신 분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종무소 앞의 오래된 처진올벚나무(수양벚나무)와 전나무로 추정되는 침엽수도 보기좋았고, 원통전 뒤편과 각황전 사이의 선암매도 볼만 하다.

그 외에도 대각암으로 오르는 중간 바위면의 마애여래입상은 7m 높이의 바위면에 옴폭 들어가게 새겨진 불상으로 고려 후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무우전과 각황전 뒤로 난 숲길을 조금 오르면 시원스레 뻗은 키큰 삼나무들 아래 네모반듯하게 정비된 잔디밭 중앙에 크고 멋진 비석 두 기를 볼 수 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절을 약휴대사가 힘들게 복원한 내용이 기록된 중수비로 조각이나 표현기법이 아름답다.

선암사 이야기는 해도해도 할 것이 많은 사찰이다. 무엇보다 지도를 들고 경내를 두 번이나 돌았음에도 결국 못 보고 지나친 것들이 있을 만큼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전각이나 문화재가 많다. 하지만 은목서향에 빠져있는 동안 무슨 마술에나 걸린 듯 힘들다 여겨지지않고 뱅글뱅글 돌며 구석구석 보게 되는 사찰이기도 하다. 다만 후회없는 구경을 위해서는 체력과 간식을 꼭 챙기시길 당부한다.

해뜨자마자 출발하느라 아침을 안 먹고 차에서 빵과 커피로 가볍게 먹고 다녔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 옆에서 배고프다고 메들리를 불러댔다. 하두 배고파~ 배고파~ 해서 귀에서 피나기 직전에 잠시 선각당으로 내려가 연꿀빵과 단호박두부과자로 요기를 하고 다시 대각암쪽으로 올라갔는데, 선암사는 연꿀빵마저도 정말 촉촉하니 맛있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현금결제만 된다는 사실.
2019 대한민국 관광사진 공모전 대상을 받은 멋진 풍경의 도솔암이 있는 해남 땅끝의 미황사 찻집에서는 천 원짜리 엽서를 사도 카드결제가 되는데, 만 원짜리 꿀빵이 현금결제만 된다니 불편했다. 게다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선암사 경내에 있는 찻집이 말이다. 이 점은 빨리 개선되면 좋겠다. 요샌 현금을 잘 안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기껏 물건을 고르거나 차를 주문해놓고 현금이 없어 얼굴 붉힐 일이 생길까 걱정이다.

그나저나 내년 식목일엔 은목서 나무를 구해서 집 가까운 곳에 심어야겠다. 아파트살이라 우리집 정원이 따로 없는 대신, 아파트 화단 빈곳에 심고 잘 가꾸면 가을마다 은목서 향기를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겠지?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풍경이다.^^​

* 선암사의 문화재에 대한 정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의 미 산책, 답사여행길잡이를 일부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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