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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30. 2020

내 마음의 안식처

제천 배론 성지

무려 54일간이나 이어질지 몰랐던 긴 장마에 돌입하고 중반쯤 된 7월에 간 곳인데 자꾸 생각이 난다. 그때만 해도 '이제 곧 장마가 끝나겠지? 올 장마는 장마같지도 않네~' 하면서 무심히 지나치던 장마기였다. 그 뒤로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져 전국 곳곳에서 물난리와 산사태가 나고, 역대급 태풍이 연달아 세 번을 몰아치면서 그 어느 해보다 강력한 장마가 정신이 번쩍 들만큼 화끈한 뒤끝을 준비하고 있을 줄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광풍이 몰아닥치기 전에 방문했던 제천 배론 성지는 마음이 시끄러울수록, 일상에 지칠수록 성당 앞의 초록 가득한 잔디밭에서 무지개빛 비눗방울 풍선이 동글동글 날아올라 하늘로 퍼져나가던 평화로운 정경이 떠올라 조용히 나의 힘이 되어주는 곳이다. 카톨릭교인은 아니지만 여행길에 우연히 성지가 눈에 뜨이면 갈길이 바쁘지 않는 한 되도록 찾아가는 편인데, 청양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 이후로 가장 인상깊고 좋았던 곳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원래는 구학리 623번지였던 구주소가 도로명으로 바뀌며 배론성지길이 되었다. 제천- 원주간의 국도변에 커다랗게 보이는 이정표를 따라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그 길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곳이 배론 성지이다.

'배론'이란 말은 처음 들어도 자꾸 들어도 외국지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왜 제천 이 시골구석에 저런 외국스런 지명이 있는 것일까 몹시 궁금했다. 알고보니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한자로 하면 주론(舟論)이지만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배론성지가 들어앉은 골짜기 서쪽에 주론산(903m)이 솟아 있다. 이 산의 정상에서 정동쪽으로 조백석골과 배론성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데, 그 지형이 배의 밑바닥과 흡사하다고 한다. 배론성지 한가운데로는 제천천의 상류인 구학천이 흘러간다.


배론성지는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조선 후기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으로, 조선시대의 행정지명은 제천현 근우면 팔송정리 도점촌(옹기 굽는 곳이란 뜻)이다. 1791년(정조 1)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 황사영(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1821∼1861) 신부의 묘가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이가환·이승훈·정약종·주문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구학리 배론 산골에 숨어살았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황사영도 배론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써서 황심·옥천희에게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그는 대역부도죄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배론의 토굴에서 쓴 밀서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배론의 토굴은 황사영이 내려왔을 당시 옹기 저장고로 위장됐는데, 그는 8개월간을 이 굴에서 숨어 지냈다. 현재 우리가 보는 토굴은 1987년 이원순 교수가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토굴 안의 밀서도 원본이 아닌 복사본이다. 황사영백서는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55년 메스트로 신부는 성인 '장주기 요셉'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일명 배론신학교)를 세웠다.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등 프랑스인 신부들의 지도 아래 10여 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운 이들이 사제의 길에 들어설 무렵 병인박해(1866년)가 발생했다. 두 신부와 장주기 요셉은 각각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고(갈매못 성지도 가봤다. 성당 앞에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신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리고 지금의 건물은 2003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초가 형태로 지어진 성요셉신학교를 2명의 신부 동상이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 방안에는 무릎을 꿇거나 혹은 꼿꼿이 서서 천주학을 공부하던 당시 신학생들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도 이곳에서 1861년 순교하였는데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최양업은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마카오에서 유학한 후 1849년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교활동에만 몰두한 나머지 1861년 식중독과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최양업 신부는 성요셉신학교 산기슭에 묻혔다.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를 추모하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조각공원에 들어서면 어떤 숙연함이 느껴진다. 마치 현충원에 참배온 느낌이 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최양업 신부의 출생에서부터 안장에 이르기까지 짧지만 위대했던 일생이 30장의 벽화로 그려져있다.



이외에도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인 남종삼의 생가가 있는 지역(산넘어 묘재)이라서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배론성지는 1911년 경성교구에 속해 있다가 1968년 원주교구에 속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배론성지는 가톨릭 성지이지만 일반인들도 부담 없이 찾아가서 산책하고 명상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제천 10경 가운데 마지막 10경이고황사영 순교기념탑과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 조각공원이 대표건물이다. 성모상이 있는 너른 잔디밭을 가로질러 '미로의 기도' 장소도 꼭 가보시길 추천한다. 우리의 삶처럼 출구를 찾기 어려운 미로가 바닥에 붉게 그려져 있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위안을 얻는 곳이라고 한다. 


'인생 여정에는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걸으면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인생 여정을 압축한 이 기도문을 떠올리며 

미로를 천천히 걷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대성당은 무슨 공사중이어서 못 들어가봐서 좀 아쉬웠지만, 잘 가꾸어진 성지 안을 거닐다보면 종교에 대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삶을 불태운 사람들의 오롯한 정신과 그들이 남긴 '인류애'라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제천 배론성지가 내게 오래도록 기억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음의 위안 얻고 명상체험까지, 배론성지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에서 배론성지에 관한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배론 성지 대성당 앞 풀밭



미로와 고난의 예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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