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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5. 2020

석주 이상룡이 남긴 유산

♧ 안동 임청각과 법흥사지 칠층전탑 ♧


* 지난 6월 말에 다녀온 곳입니다. 8.15 광복 75주년을 기리며, 안동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님에 관한 글 올립니다.*


남편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골수팬이다. 드라마에 나온 대부분의 장소를 거의 다 찾아가봤다. 같이 붙어다니다보니 나도 대부분 가보았는데, 특히 안동에는 만휴정, 고산정과 더불어 일제가 철도를 내려고 부쉈던 고애신 집 장면의 모티브로 알려진 '임청각'이 있다.


안동 임청각은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를 빌려 이름을 지은 조선시대 민간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으로 500년 역사를 간직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자 보물 제 182호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의 가옥으로 항일독립투쟁 과정에서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집을 팔았던 것을 문중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 다시 사들이기도 하는 등 애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자,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일제강점기에 불령선인의 집이라 민족정기를 끊는다며 중앙로 철로 개설을 이유로 99칸 건물중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있는 것을 문화재청이 2018년부터 복원중이다.

훼손되기 이전의 임청각과 그 주변을 1763년 문집 <허주유고> 속 그림인 ‘동호해람’, 1940년을 전후하여 촬영된 사진과 지적도 등 고증이 가능한 자료를 근거로 옛모습에 가깝게 종합적인 복원계획을 세우고, 2025년까지 280억원을 투입해 복원키로 했다고 한다. 그중에 임청각 진입부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그 뜻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기념관(70억원)이 들어선다는데 6월 말에 갔을 땐 아직 안 보였다.


임청각 진입로가 두 군데인데, 주요진입로가 아닌 월영교 가는 길목에서 좌회전하여 접어든 철교 아래 진입로로 들어가면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 16호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17m 높이의 웅장한 자태로 우리를 반긴다. 전탑은 벽돌로 만든 탑을 말하는데, 안동은 전탑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전탑이 많다. 여기말고도 풍천면 금계리에 오층 전탑이 있고, 권정생선생님이 사셨던 일직면 조탑리에도 오층전탑이 있는데 지금은 보수중이라 볼 수 없었다.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단부에 팔부중상과 사천황상, 12지신상이 돋을새김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조각수법으로 보아 제작연대에 서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

현재 상륜부는 노반(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만 남아있는데 원래는 금동제 상륜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탑은 만들어질 당시엔 기와지붕을 얹고 맨 위에 화려한 금동상륜을 씌워 마치 갑옷과 투구를 다 갖춰 입은 듯한 늠름한 모습이었을 텐데, 조선시대에 객사소용물을 만들기 위해 금동장식을 거두어가고, 일제강점기에는 바로 옆으로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답답한 모양새의 ‘기찻길 옆 탑’이 되어 투구도 벗겨지고 갑옷은 누더기가 되고 말아 안타까웠다.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철로 옆을 50m쯤 걸어가면 드디어 임청각이 나온다.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임청각의 주인은 고성 이씨 가문으로 벼슬하기보다는 학문에 힘썼던 안동 양반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자유의 반대는 노예이다.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가? 그러면 노예의 습관을 고치라!'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을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어서 현재 사당에는 위패가 없다. 500년 종가의 종손으로서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결단을 내린 분이기에 집을 팔아가면서까지 독립운동을 하실 수 있었으리라.


수많은 독립열사들과 시인 묵객들이 묵어간 군자정은 안동 3대 정자 가운데 하나로 이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성장한 이상룡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전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치셨다. 임청각 들어가서 왼쪽으로 맨 처음 마주하는 바깥루방에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 역사에 관한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기록들을 보는동안 마음이 숙연해져옴을 느끼게 된다.


이상룡 선생은 1932년 만주에서 순국하시며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고, 이상룡의 유고를 안고 귀국한 아들 이준형은 십여 년간 일제의 끈질긴 고문과 협박을 받아오다 아버지의 문집인 '석주유고' 정리를 마치고는 "일제 치하에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일제가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을 부설한 1942년 자결했다.

왕산 허위, 백하 김대락, 우당 이회영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인 이상룡 선생의 집안은 아들, 손자, 조카들이 모두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며느리들까지 모두 11명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고, 사위들 역시 다섯 명이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라에 바쳐 독립운동을 한 이상룡 선생의 국적은 2009년이 되어서야 회복되었고, 마당엔 여전히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놓은 철로가 지나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고 속상한 일이다. 복원사업이나마 착착 진행되어 부디 옛모습을 하루빨리 되찾길 바란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품위를 지키고, 어려운 주위사람들을 돌보고 베풀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이 위대한 정신을 면면히 이어온 고성 이씨 이상룡 선생의 가문이 후대에도 길이길이 빛나길 두손 모아 빌어본다.


*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독립정신을 일깨운 석주 이상룡 선생의 일대기가 2020년 8월 8일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랐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을 기념하여 경북도청에서 주최하고, 로얄오페라단에서 주관한 창작 오페라 ‘석주 이상룡’에 관한 내용을 링크합니다.

https://m.blog.naver.com/kangs567/222055639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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