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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10. 2020

나의 예쁜 오재미

가을운동회 추억

더운 여름이 가고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들녘에서 거둬들인 게 많아 먹을 것도 풍부한 10월은 딱 놀기 좋은 때다.

그래서 온갖 야유회와 가을축제와 학교운동회가 잡혀있는 때가 10월이다. 아니 그랬다. 올해 코로나 때문에 대부분의 야외행사가 다 취소되지만 않았다면 아마 올 10월도 학교운동장이나 너른 공원엔 북적이는 인파와 호루라기 소리로 시끌벅쩍했을 것이다.

어머님과 고구마줄기 껍질을 까며 나눈 대화 중에 학교 운동회 때가 되면 각자 집에서 만들어가던 오재미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혹시 개그맨 오재미를 떠올리신다면 곧 정정하실 것을 바란다.

오재미는 오자미의 방언으로 헝겊 주머니에 콩 따위를 넣고 꿰매서 공 모양으로 만든 것을 이른다. 흔히 콩주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요것!(아래 사진)

"우리 엄마가 솜씨가 좋으셔서 딴 거는 다 만들어주셨는디, 오재미는 어째 못 만드셔서 학교 댕김시롱 운동회 한다고 오재미 만들어온나~ 하고 선생님이 숙제 내주시믄 내가 다 만들어갔지야."

"어머님 아래 동생들 꺼도 다 만들어주셨겠네요?"

"그랬제. 학교에서 만들어오라고 할 때마다 내가 다 해줬응께. 학교 가서 운동회날 함지박에 모여있는 오재미를 보믄 내가 만든 것이 젤로 이쁘더라. 누구는 네모나게 만들어오고, 누구는 듬성듬성 바느질해서 금방 터질 것 같고, 누구는 후줄근하니 만들어서, 모양이 다 지각각인디 내가 만든 거는 한눈에도 딱 각이 잡혀서 빵빵하니 이뻐서 눈에 뜨였재."

"그때도 콩 넣어서 만드셨어요? 저 때는 노란 콩이나 팥 같은 거 넣었거든요."

"원래는 오재미를 팥주머니라고 불렀니라. 긍께 팥을 넣어야 맞는디 우리 때는 콩도 넣고, 보리도 넣고, 쌀도 넣고 그랬다만 그때는 우리집이 콩이고 보리고 쌀이고 먹고 살 양식도 부족한디 오재미 속에 그런 걸 넣겄냐? 집앞 냇갈옆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모래 퍼다가 넣어서 만들었재."  

"아마 요즘 나오는 오재미는 모래 넣어서 만들 걸요? 앞서가셨네요~ 어머님이^^"
(찾아보니 모래를 넣으면 모래주머니, 콩을 넣으면 콩주머니라고 부른다. 속에 무엇을 넣든지  '오자미'라고 부르는 것은 동일하다.)

"오재미로 큰 박 터트리기가 운동회 제일 끝에 하는 거라 청군 백군 나눠서 응원도 아주 불나게 했. 난 그 청군 백군 띠도 직접 만들어서 머리에 묶었지야. 오재미는 매년 새로 만들었는디, 청군 백군 띠는 앞뒤로 청백색 띠를 만들어서 교대로 바꿔가며 썼제. 학년별로 반별로 청군 백군이 달랐응께."

"시골에서 운동회하면 식구들, 동네 사람들 다 와서 구경하고 재밌었는데. 저 어릴 때는 차가 없으니까 경운기에 우르르 타고도 오시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도 타고 오시고, 머리에 이고 두 손에 바리바리 먹을 거 싸들고 걸어서 오시는 분들이 많았죠. 그렇게 오셔서 하루종일 먹고 놀고 마시고 그랬는데~"

"학교 운동회하믄 동네잔치나 진배없었~ 그래도 일이 바쁘믄 못 가기도 하고 그랬어야. 한창 가을걷이할 때라 먼저 할 일이 있으믄 어쩔 수 없었. 아무리 그래도 운동회 날은 일할 사람 모으기도 어려운께 어지간하믄 다들 갔지야.

햅찹쌀로 밥하고, 햇깨 볶아서 깨소금도 만들고, 밤도 삶고 해서 석작에 넣어서 이고들 갔재. 그란디 우리 엄마는 한 번도 운동회 못 와봤어야. 할머니가 늘상 오셨. 생각하믄 할머니도 참 나쁘셨제. 자식들 운동회 하믄 보고자플 것인디 여섯을 학교 보냄시롱 한 번도 못 가보셨당께. 집에서 일만 하시느라."

"에궁 할머님도 너무하셨네요. 자식들도 할머니보단 엄마가 구경오시는 게 더 좋았을 텐데..."

"그랑께 말이다. 운동회뿐만 아니여. 밖에 나가는 일은 할머니가 다 하셨어야. 장 보러 다니는 것도 할머니가 머리에 뭐 이는 거 힘들어서 못 가실 때까지 엄마는 가보도 못했. 하여간 요즘에야 듣도 보도 못한 축제가 많지만 그땐 축제랄 게 학교운동회밖에 더 있겄냐? 가믄 좋은 귀경도 하고,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도 만나고, 먼 동네 사람들까지 한꾼에 다 봉께 운동회한다고 하믄 다 보러 갔."

"맞아요~ 그랬어요. 진짜! 봄 가을 운동회때마다 온 마을이 들썩들썩했겠어요~^^"

"아녀~ 우리는 가을에만 운동회를 했어야. 봄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랑가 안 하더라~"


-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 터지게 응원하며 운동회의 피날레를 장식하던 큰박 터트리기. 아이들이 두 손에 오재미 하나씩을 들고 우~~~하니 커다란 상대편 박 아래 몰려가서 던지다 보면, 박은 못 맞추고 엉뚱하게 반대편에 있는 아이 얼굴을 맞춰서 눈탱이 밤탱이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더랬다.


요즘엔 실버대학이나 치매예방센터 같은 곳에서 직접 오재미를 만들어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소싯적 기억을 떠올리며 박터트리기 놀이를 즐겁게 하신다고도 한다.

만국기 펄럭이는 운동장 가득 울려퍼지던 함성과 신나는 웃음소리, 솜사탕이나 엿, 아이스크림, 병아리를 팔러 온 노점상들, 나무그늘 아래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먹던 점심, 한 달 동안 방과후나 심지어 수업시간까지 빼가며 열심히 준비한 각종 율동과 부채춤, 마임, 차전놀이, 강강술래 등을 선보이기도 했던... 온 동네 축제장이었던 학교운동회가 그립다.

지금은 많이 간소화되고, 점심도 학교급식으로 대체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 오랫만에 만날 수 있는 자리가 학교운동회인데 그나마 코로나여파로 아예 열리질 않으니 더더욱 그립다. 내년엔 들썩들썩 신나는 그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 사진은 펌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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