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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11. 2020

결벽증 시어머니와 사는 법

깔끔며느리 대환영! 그러나...

고백하자면 난 결벽증과는 담쌓은 사람이다.
우리 어머님은 이런 면에선 나와 정반대시다.

2006년 3월 합가를 하면서 대전에 내려오신 어머님은 10년간 쭉 해오시던 산악회 등산을 위해 매주 토요일 새벽이면 서울로 올라가시곤 했다.

처음 몇 번은 새벽에 아침진지를 차려드렸는데,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면서 직접 차려 드시고 가셨다. 희한한 건, 분명 아침을 드시고 가셨음에도 주방에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아 돌아가시며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어머님은 '가족에게 내가 먹은 흔적을 알리지 말라'가 생활화되셨다.

드시고 나면 설거지는 물론 설거지한 그릇의 물기를 마른 행주로 닦아서 없앤 뒤 그릇장에 넣어두시고, 싱크대의 물기도 다 닦아서 뽀송뽀송하게 해 놓으신다.
그러니 어머님 나가신 뒤에 아침을 준비하려고 부엌에 나가보면 도대체 뭘 드신 걸까? 싶게 아무 흔적이 없는 거다. 눈을 씻고 찾아도.

이거 하나만 봐도 어머님만의 깔끔한 성격과 며느리에게 티 내고 싶지 않으신 성정까지 그대로 드러난다.

미니멀라이프가 오래전부터 습관화되신 어머님.
짬만 나면 갖고 계신 물건들을 수시로 솎아내서 버리신다. 하다못해 앨범의 사진까지 다 뜯어내서 앨범은 앨범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다 찢어서 버리신다. 어느 날 우연히 쓰레기봉투에서 찢어져 버려진 사진을 보고 놀라서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사진을 다 찢어버리셨어요?" 했더니

"옛날 사진 둬서 뭐하냐 짐만 되는 걸. 앨범이 쓸데없이 자리 차지하길래 버릴라고 본께 사진은 떼고 버리려다 내친김에 다 버렸다."

이러신다. 난 절대 옛날 사진 못 버리는데 뭘 버리는 데 있어선 어머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
사진뿐이랴? 짐 된다고 그간 받아오신 상장 트로피 감사패까지 다 버리셨다. ㅜㅜ
멀쩡한 이불, 옷, 그릇, 대야, 장식용 소품들까지 어머님 손에서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것들이 많다.
언제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뒤에 구질구질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어머님이시다.

2년 전 유난한 결벽증으로 시집을 초토화시킨 새언니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히트를 친 적이 있다.
필명 '카라'인 자신의 블로그에 연재하다 넘나 재미나서 '결벽증 새언니'라는 책까지 나왔다.
어머님께 그 책 1편의 한 대목을 들려드렸더니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거였다. 바로 이 대목.

- 얼마 전 엄마 심부름으로 오빠 집 간 적 있음

엄빠가 새언니 2한테 워낙 듸셔서 오빠 집 근처도 안감. 나도 안 가려다 엄마가 죽어도 본인은 가기 싫으시고 오라 그러기도 싫다고 오빠만 오라 그랬다가 새언니 달고 올까 봐 싫다고 니가 가라 명령함. 정말 백일 휴가 복귀하는 군인의 마음으로 오빠 집을 감. 때마침 새언니 회사 사람 결혼식 가서 오빠 혼자였음

현관에서부터 위생적 아우라가 느껴짐
집안에 들어가는데...

진짜 전실에 청소기들이 종류별로 다 서있음
밀어 닦는 거 밀어 빠는 거 밀어 쓰는 
 혼자 닦는 거 자기 혼자 빠는 거 기타 등등
현관에 소독용 에탄올까지 있음
세탁실에는...

나는 우리나라 세제가 그리 종류가 많은 걸 첨 알음
심지어 락스는 말통으로 가따놈
이 집구석은 락스를 마셔서 기생충을 죽이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봄

거기다 세제들 라벨이 한 방향을 보고 있음
거실은 그냥 모델하우스 보는 줄
씽크대 위에 그 흔한 밥통도 없음
냉장고 안에 김치 된장 고추장 바께 없음
퇴근하면서 딱 먹을만치만 사서 요리해먹고 치운다 함
거실에도 6인용 식탁이랑 티비 바께 없고
혼자 쓸고 빠는 로봇 청소기들만 미친 듯이 돌아다님.

커텐도 없음. ....    이하 중략 -

한달음에 읽어드리니 박장대소를 하시며,

"아이고~ 나도 그렇게 살았으믄 원이 없겄다."
그러신다.

"어째 어머님 취향이실 거 같더라니~
이 책 한 번 읽어보실래요?"

하고 드렸더니 몇 시간 만에 후딱 읽으셨다.
눈이 안 좋아 책 읽는 거 힘드시단 분이^^;;
책 돌려주시며 하신 말씀.

"나는 이런 며느리 대환영이다~
세상 깔끔하니 마음에 딱 드는고만!"

불행히도 난 그런 며느리가 아니다.
결벽증 새언니 같은 사람이 며느리였음

더 좋으셨겠지만 어쩌랴~
우리의 운명이 이런 것을...

다행히 어머님은 당신의 깔끔함을 나에게 강요하시거나, 은근 눈치라도 내비치며 스트레스 주시지 않는다. 어머님 영역 빼곤 그냥 다 내려놓으신 것 같다. 간혹 정 눈에 거슬리시면 나 없을 때 뚝딱 해치우신다.

나는 그저 나중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호들갑 떨며 어머님 덕분에 엄청 깨끗해졌다고 감사인사를 연발하면 된다. 그럼 어머님은
'나 아니면 이 집구석이 깨끗하게 유지가 되겠냐?' 하시는 표정으로 내심 뿌듯해하신다.

결벽증 시어머니와 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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