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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12. 2020

녹두죽 따라 삼만리

니들이 죽맛을 알어?

죽을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종종 호박죽, 팥죽을 50인분 솥으로 가득 끓여놓으시곤 한다. 나머지 가족은 죽을 별로 안 좋아하는지라 처음 끓인 날만 한 그릇씩 먹고 그 뒤론 거의 어머님 차지다. 참 팥죽은 남편도 곧잘 먹는다.

며칠 전 일요일에 아이들과 나들이를 다녀오니
(멀미 난다고 차를 잘 안 타시려 해 우리만 다녀옴) 어머님께서 녹두죽을 30~40인분 솥으로 한 가득 끓여놓으셨다.

점심을 늦게 먹은 데다 배불리 먹은 탓에 난 배가 안 고팠는데, 남편과 애들은 배가 고파하기에 녹두죽 있으니 알아서 먹으라 했더니만 녹두죽은 패스하고 토스트 궈서 딸기잼 발라 먹었다. 귀한 녹두죽을 몰라보고~

결국 녹두죽은 어머님께서 매일 일용하는 양식으로 남은 셈이 되었고, 어머님은 점심이나 이른 저녁을 혼자 드실 때 죽그릇 하나 가득 떠서 열심히 소비하고 계셨다. 어제 낮에 어머님 죽 드시는 걸 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여쭈었다.

"원래 녹두죽이 해독 음식으로 먹는 거 아니에요? 몸이 안 좋거나 뭐 잘 못 먹었거나 할 때... 어디 편찮으세요, 어머님?"

"아니~ 주방 창고 정리하다 녹두가 보이길래 끓여봤다."

"다행이다~ 난 또 어디 편찮으신가 했네요.
제가 여섯 살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요.

예전엔 돌아가신 뒤로 집안에서 백일 동안 따로 상을 차려두고 끼니때마다 진지 올리고 향 피우고 소주 따라 올리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그 상 아래 소주 됫병이 늘 있었는데, 가을에 어른들 다 들에 나가 일하고 계실 때 세 살 된 사촌 여동생이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제 여동생이랑 둘이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됫병에 반 남아 있던 소주를 다 마셨지 뭐예요?

작은엄마가 새참 챙기러 들어와 보니까 두 어린것들이 얼굴은 시뻘개져갔고 입으론 막 토해놓고 축 늘어져있는데 방바닥은 술천지라 술냄새는 가득하고~ 남자 어른들이 와야 데리고 병원을 갈 것인디 오실라믄 멀었으니 그동안 술 마신 거 해독한다고 녹두죽을 끓이시더라구요. 우선 녹두죽이라도 멕여서 속을 좀 달래 놔야 한다고.

약으로 쓰인다니 한입 달란 말도 못 하고 옆에서 보고 있다가 동생들 멕일 죽을 그릇에 뜨고, 냄비 바닥에 남은 녹두죽을 작은엄마 안 보실 때 숟가락으로 긁어서 먹어봤는데... 당최 맛이 하나도 없더라니까요~"

"원래 녹두죽은 약으로 먹는 겅께 설탕도 안 뿌리고, 소금간만 살짝 해서 먹는 거라 어린 입에 맛있을 리가 없지야~. 니가 그 말 한께 나도 생각나는 게 있다.
독천 이모랑 광주 외삼촌도 그런 적이 있단다.

내가 나민이만할 땐께 이모가 여섯 살, 외삼촌이 세 살쯤 됐을라나? 강진읍에 사시던 작은 고모부님이 인사드리러 오느라 소주 됫병을 사들고 오셨단다. 초봄에 바람 썬득썬득할 때라 보리밭 맨다고 어른들은 밭에 나가 다 일하고 있응께 할머니 찾아뵈러 간다고 술을 방구석 한쪽에 놓고 밭에 나가셨단마다. 집에 있던 어린 동생들이 그 술이 맛있어 보였던지 둘이 새 술병을 따서 열심히 노나 먹었지 뭐냐? 일 끝나고 들어와봉께 이것들이 입에 뽀글뽀글 게거품을 물고, 방에단 다 토해놓고, 얼굴 뻘게져서 자빠져있더란다. 가만 봉께 방바닥에 술병이 굴러다니고 술냄새가 펄펄 난께 이것들이 술 마시고 이렇게 되얐는갑다 하고선 녹두죽을 끓였지. 아직 다 끓지도 않은 녹두죽을 후후 불어가며 멕이고, 동치미 국물도 멕이고 한참을 부산 떨고 나니 정신을 차리길래 뭐할라꼬 술을 먹었냐고 물어봤지~

할머니가 평소에 진지 드시며 밥그릇 덮은 보시기에 술을 따라서 따뜻이 뎁혀 반주로 드시곤 했는디 그것이 맛있어 보였등가, 이모가 외삼촌한테 멕일라고 보시기 가져다가 따르다 보면 넘칠락말락한께 지가 한 모금 쭉 마시고 동생 주고, 또 따르다 보면 많은께 지가 먼저 후룩 마신 다음 동생 멕이고~ 그렇게 따르면서 방바닥에 술은 다 흘리고, 마시다 보니 술에 췌서 그렇게 되얐드란다. ㅎㅎㅎ

다 잊어뿐 줄 알았는디, 니가 말한께 생각이 난다야. 참말로 생각할수록 우습네~"

"애기들이 무슨 술맛을 안다고 그렇게 마셨을까요?^^"

"그랑께 말이다. 나 어릴 땐 할머니 편찮으시면 녹두죽을 푸욱 끓여서 체에 밭쳐 곱게 내린 다음에 미음처럼 해서 드렸단다. 아버지 노름해서 홀랑 털리고 오면 속상하셔서 드러누워계시곤 했는디, 그때마다 울 어머니가 정성스레 만들어서 갖다 드리믄 어떤 날은 죽그릇을 며느리한테 집어던지기도 하셨지. 아니 당신 아들이 잘못한 걸 왜 며느리 타박을 해. 속상하기로 따지믄 어머니가 더하셨을 것인디 평생 아무 말도 없으셨지야."

녹두죽 따라 삼만리는 이렇게 끝이 나고,
어머님도 녹두죽 그릇을 다 비우셨다.
이야기가 끝난 뒤 조금 떠서 먹어본 녹두죽은 살짝 간간하고 고소했다. 맛 괜찮네~ 나물 맛을 알면 어른이 된 거라는데, 녹두죽맛을 아는 것도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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