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Nov 17. 2020

차곡차곡 추억을 담은 집

진정한 집의 가치

난 어릴 때 이사 가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다.
멀리 이사 가느라 전학을 가는 친구는 나의 로망이었다. 가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는 언제 이사 간당가? 우리도 딴디로 이사가믄 좋겄는디~."

"이사 댕기는 것이 뭐가 좋다냐?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게 제일 좋재!"


얄짤없이 이사의 희망을 꺾어버리시는 엄마가 야속했지만, 왜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꿈꾸던 이사는 고등학교를 큰 도시로 가면서 시작돼 18년간 총 14번을 했다. 이사는 참 힘든 일이었다. 2006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한 이후 지금까지 난 한 집에서 15년째 붙박이다.


내가 그렇게 이사를 다닐 동안, 고향집은 지어진 이후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나의 첫 번째 집이자, 우리 사남매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 부모님과 함께 그곳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모른다.


고향집은 아빠가 결혼하시기 전에 손수 자재를 마련해 직접 지으신 집이다. 그니까 어림잡아 50년은 넘었을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 집의 외양은 초가에서 기와, 옥상이 있는 양옥으로 변하고, 난방방식도 불 때는 아궁이에서 연탄보일러, 석유보일러를 거쳐 전기보일러로 바뀌었다.


50년 세월 가운데 30년 넘는 동안 가장 긴 외피를 입었던 기와집은 그 사이 네다섯 번의 구조변경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잦은 리모델링의 대상이 되었던 뒷방과 다락방은 나의 오랜 기억창고이자 그리움의 장소이다.


처음 뒷방과 다락방이 있던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내 나이 여섯 살이었다. 뒷방에서 자고 있는데 이른 아침 큰할머니께서 "니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얼른 일어나 봐라." 하며 깨우러 오셨다. 난 눈꼽을 띠며 안방으로 가서, 윗목 위에 하얀 천을 덮고 길게 누우신 할아버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뒷방에 가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갑자기 집을 가득 메운 손님들과 맛있는 음식들에 신이 나서 동생들과 놀러 다녔다.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뒷방은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마 아빠와 우리들이 쓰던 방이었다. 아궁이가 따로 있어서 주로 그 아궁이에는 소죽을 끓이곤 했는데, 나중에 연탄보일러로 바꾸면서 뒷방까진 보일러를 놓지 않아 한동안은 창고처럼 쓰였다. 철 지난 선풍기, 제사 때나 손님 많이 올 때 꺼내 쓰는 큰 상, 제철이 아닌 이불과 옷들, 오래된 일기장과 교과서 등이 이 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으면 한낮에도 다소 어두웠던 그 방은 뒤안을 흘끗거리던 은밀한 햇빛이 커튼 친 창문 사이로 살짝 내리비치던 곳이었다. 남들 모르게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려 들면 우린 이 뒷방에서 각자 조용히 처리했다.


안방에 달려있던 다섯 개의 나무 계단을 딛고 올라가야 하는 다락방은 어린 사남매의 간식창고였다. 장날에 할머니께서 튀겨오시던 튀밥과 뻥튀기, 명절 때면 만들던 다양한 다식들과 정과들, 계절마다 제철 재료로 만드는 부각 같은 것들이 그 다락엔 늘 있었다. 선물로 들어온 과자들과 달디단 설탕포대까지도! 하나마나한 달팽이 모양의 자물쇠가 걸려있었지만, 그것이 있기에 더욱 우리들의 공략대상이었다. 할머니와 엄마께서 우리에게 적지 않게 간식을 주셨지만 어른들 몰래 슬쩍 먹는 게 제일 맛있었다.


나중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다락방을 없애고 바로 문 열고 들어가서 쓸 수 있는 아빠의 업무용 방으로 만들었을 때도 이 방 한쪽엔 시렁을 만들어서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 얼마 뒤 이 방 한쪽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이고, 드디어 나만의 공부방이 생겼다. 물론 여전히 아빠 책상은 창문 옆에, 머리 위에는 시렁이 놓여있었지만 처음으로 생긴 나만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카세트테이프로 유행가를 듣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사춘기를 보냈다.


뒷방은 한참 뒤에야 이 방에 보일러를 놓으면서 여기에 연결된 또 하나의 창고방으로 태어났다. 여전히 보일러가 들어가지 않아 냉골이었고, 시렁에 올려져 있던 물건들, 장롱들이 새로 생긴 뒷방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가끔 그곳을 들락거리며 비밀모의를 하기도 하고, 간식들을 가져다 먹었다.

개조된 다락방은 마지막에 할머니방으로 쓰였다.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10년을 와병하신 할머니께서 마지막까지 쓰시던 방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도 퇴근하신 아빠가 집에 들어오시면 제일 먼저 문을 열어보고 안부를 여쭈려다 빈 공간을 보고 허망해하시던. 오랜만에 친정에 내려간 내가 한참을 머물며 할머니의 흔적을 찾던 방이기도 했다.

이제 그 방은 없다. 양옥으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완전 탈바꿈해 예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각자의 가정을 이룬 사남매가 고향집에 가면 아이들이 주로 머무는 방이 되었다. 그 방에는 컴퓨터가 있고 팡팡 뛰어도 좋을 커다란 침대가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가셨지만, 왠지 흐뭇하게 늘어난 자손들을 보고 계실 것만 같다.


반백 년 세월을 한 곳에 자리한 집을 떠올릴 때마다, 그 집에 머물렀던 가족의 추억이 함께 소환된다. 지금은 곁에 없는 가족의 기억까지도 고스란히. 그래서 난 고향집이 앞으로도 쭉 그 자리에 있기를 소망한다. 집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된 부동산이 아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길 바란다. 나 또한 내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킬 추억 가득한 집을 남겨주고 싶다.


30년 넘게 있었던 내가 나고 자란 기와집과 담벼락. 남편과 딸
2004년 리모델링한 집앞에서 부모님과 세 살 딸
예전엔 외양간과 창고가 있던 곳과 멀리 푸세식 화장실


옥상에서 바라본 집 앞 풍경과 입구의 논
집 뒤 청보리밭에서 본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