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을 감당하는 힘
겨울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초였다.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고, 아직 크리스마스는 저만치 있어서 실감은 나지 않던 정도의 어느 날이었다. 이 날은 새벽 일찌감치 일어났다. 이불을 걷어낸 방은 공기가 찼고, 현관의 커다란 유리창엔 성애가 끼어 있었다. 여기가 시골이라 더 그런지 춥다. '아! 오늘은 밖에 나가기 싫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입사 동기들은 방역복을 겉에 입고서, 현관 앞에 모여 바로 근처의 농장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새끼 돼지가 태어나는 것을 본다고 했다. 앞장선 농장 관리인의 뒤를 따라 모돈사로 들어갔다. 돈사 앞의 소독약을 몸에 뿌리고 붉고 따뜻한 빛이 흐르는 모돈사에 들어선다. 커다란 돼지들이 숨 쉬는 소리, 1kg 정도 되는 작은 새끼들이 태어나 플라스틱 바닥을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 끼익대며 소리를 내는 녀석들이 보인다. 처음엔 여기 들어와 맡는 냄새가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 익숙해졌나 보다. 정확히는 육성돈사에서 나는 냄새에 비하면 괜찮아졌다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 모돈사의 엄마돼지들이 분만을 했다. 엄마돼지 한 마리당 열 마리에서 열두세 마리 정도를 낳았다. 우리는 돼지마다 얼마씩의 새끼를 낳았는지 기록한다. 아직 분만 중인 녀석도 간혹 보였으나, 우리 연수생들의 몫은 아니다. 그들에겐 농장 관리인이 붙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초유를 먹고 있는 건강한 새끼들이 보이고, 아직 잘 걷지 못해 바닥에 엎어진 새끼도 있다. "자, 이런 애들 있잖아? 비실비실한 애들. 못 걷고, 못 일어서는 애들, 얘네들은 키우다 죽을 확률도 높고, 다른 정상적인 애들보다 덜 클 가능성이 큰 애들이야. 이건 이렇게 탁 쳐서 죽이면 된다."
자기를 그냥 섭이 형이라 부르라고 하던 농장 관리인은 눈도 뜨지 못하고 비실대는 조그마한 새끼를 한 손으로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축산회사에 들어온 나는 생명이 이렇게 다뤄지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충격이었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놀람에 숨이 가빠지고, 방금 전 본 그 장면을 다른 것으로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처박힌 저 새끼를 보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돈장의 따뜻한 붉은 조명과 살아있는 동물의 비릿한 냄새, 여기저기 보이는 그들의 피, 바닥에 쌓여 치워야 하는 그들의 똥. 이런 것에 관심을 집중 하려 노력했다. 20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오빠는 되게 따뜻한 회사로 취업하는 것 같다." 내가 취업 소식을 알렸을 때, 학교의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따뜻한 회사일 것 같다는 말. 사료 회사라는 이미지가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에 그랬다. 귀여운 동물들, 그들의 먹이, 새끼 돼지, 송아지, 강아지, 고양이. 그게 내가 입사 전에 가졌던 사료 회사에 대한 이미지였다. 작은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게 맛있고 영양가 있는 먹이를 만드는 얼마나 따뜻하고 귀여운가?
가축 영양학을 배우던 신입 연수 시절에 들었던 말 중에 이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식물성 단백질을 동물성 단백질로 바꾸는 일을 하는 거예요." 철저히 산업적인 말이다. 단백질 전환 공장을 운영하는 중이니 그 안의 생명을 부품으로 취급하면 된다는 말일 수 있다. 그의 말대로 일반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물성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에게 식물성 단백질을 제공해 주는 일을 우리 산업이 하고 있다. 가축 영양학 수업에서 들었던 말.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절반 이상의 옥수수, 그리고 70%에 달하는 대두(콩)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 소비한다. 이 통계가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사람은 다시 그 가축을 소비한다.
이렇게 산업화된 관점에서 불량으로 생산된 부품은 조기에 폐기하는 것이 맞다. 이들에게 다른 재료비와 가공비를 쏟아부어봤자, 불량이 나와 시장성이 없어질 것이기 마련이니까. 완제품을 시장성 있는 가격에 생산하여 공급하려면 이 말이 정확히 맞는 것이고, 이들을 조기 발견하여 폐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연수를 마칠 무렵엔 나도 이들을 폐기하는데 동참하고 있었다. 산업의 원활한 순환을 위해서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들이 ‘산업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산업용 재화이다. 이 업계에 20년 이상 몸담으며 이들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산업의 논리가 맞다고 생각한다. 비용을 맞추려면 지금의 방식이 필요하고, 동물복지 이야기를 들으면 속으로 씁쓸하게 웃을 때도 있다. ‘그렇게 키워보라지, 그러면 너희가 이 가격에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솔직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불편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처음 내가 그들을 산업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하다. 다만 일을 하기 위해 한쪽 감정을 조금 더 크게 키워놓고 있을 뿐이다. 무슨 논리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 사실 때문에 그렇다. '이들은 생명이다.'라는 사실.
그리고 오래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을 내기도 한다. 우리가 더 여유로워지면 윤리도 함께 자랄 수 있다는 것. 산업혁명 시대의 아동노동이나 노예제가 사라진 것도 사회가 조금씩 여유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에도 불편함이 있었고, 그 불편함을 감당할 힘이 생긴 뒤에야 사람들은 윤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도 언젠가는 그럴 여유를 갖게 될지 모른다. 감당할 힘이 생긴 뒤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