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로 불리는 세계
돼지의 평균적인 수명은 10~15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가축으로서의 돼지는 생후 6개월 정도에 도축되고 있다. 평균 1.3~1.5kg 남짓한 몸으로 태어나 6개월 만에 110kg이 된다니, 놀라운 숫자이긴 하다. 이러한 효율 탓에 돼지는 사람들에게 선택받은 가축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축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돼지(모돈)는 2년 이상 살기도 한다. 좋은 유전자를 지닌 모돈을 선발하여 좋은 유전자를 지닌 새끼를 낳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돼지의 특성을 갖춘 품종을 교배하여 늘 일정한 품질이 유지되는 제품이 태어나고 길러진다. 이들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는 산업용 '제품'이다. 이 제품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같은 공정을 거친 뒤, 같은 품질의 상태가 된 다음 함께 도축되어 출하된다.
나는 이 산업에 오랜 기간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저 그러려니 하다가, 전혀 다른 업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면 대부분은 놀란다. 우리가 먹는 돼지가 태어난 지 6개월밖에 안된 거였어요?라는 반응이 대부분이고, 늘 고기를 먹으며 접하지만 전혀 모르던 내용이었다며, 그동안 왜 그토록 전혀 몰랐을까?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이 업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는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못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돼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임신하여 언제 태어나는지, 태어난 순간부터 몇 시간 동안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날짜와 시간 단위로 구분하고 있다. 또 생후 며칠차에 어떤 활동을 하게 되고 얼마의 체중증가가 이뤄지는지, 어떤 병에 취약하고 어떤 환경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돼지를 관리한다. 이러한 유전자를 지닌 돼지만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해당 개체는 선발에서 제외되어 도태된다.
종묘 회사에서 식물의 종자를 구매하듯, 종돈회사에서 모돈의 후보가 되는 후보돈을 구입한다. 태어난 지 7~8개월 된 후보돈을 구입하고 나서 체중이 140kg 정도가 될 때까지 키우면, 이제 임신을 할 수 있는 모돈이 된다. 역시 좋은 유전자의 정액을 구입하여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이 되면, 114~115일의 임신기간을 보낸 후에 10~12마리 안팎의 새끼돼지를 출산한다. 아직은 제품으로 출하할 수 없는 재공품의 상태이지만, 6개월간 포유자돈-이유자돈-육성돈-비육돈의 각 공정을 거친 뒤에는 상품성 있는 제품이 될 것이다.
이제 새끼들을 막 출산한 모돈은 3~4주간 젖을 먹이며 새끼를 키우는 포유 기간을 가진다. 그러고 나서 포유자돈을 이유자돈사에 넘긴 모돈은 이유 후 5~7일 정도에 재발정이 와서 다시 인공수정에 들어간다. 이렇게 모돈의 임신 한 사이클이 돌아간다. 이와 같은 총 150일 가량의 기간을 모돈의 번식 회전 주기라고 한다. 이론상 연간 2.4회전이 가능하다. 이에 미치지 못하거나 새끼의 숫자가 평균보다 적어지면 모돈은 도태된다. 한국에서 모돈은 4 내지 5 산차까지 새끼를 낳다가 도태되는 것이 평균이다. 그러니까 모돈은 대략 2년 또는 2.5년 정도를 생존하는 셈이다. 현장에서는 사실상 기계나 설비처럼 운용되며, 회계상으로는 자산으로 분류되어 통상 공정가치로 평가되거나 감가상각 되기도 한다.
잔인한 현실인가? 하지만 이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거나 현재의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에 구입해야 할 것이다. 친구들과 모여 점심으로 제육볶음을 먹기 위해서는, 가족들과 놀러 가서 삼겹살 파티를 즐기기 위해서는, 또 현재 지불하는 정도의 금액으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방도가 없다. MBTI가 F인 나 같은 사람들은 그저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는 소시지나 곱창을 먹기 위해 직접 돼지를 키우거나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과정은 축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과 이 구조를 지탱하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이를 넘어 정말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인 축산 산업의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는 구조가 된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나지 않기에, 우리는 불편함 없이 먹거리를 즐기고 있다. 이 산업에 관련된 사람들의 관심은 결국 비용과 수익으로 모이고, 그들은 누구보다 효율적이고 성실하게 가축을 길러 온전한 제품을 내보내는데 포커스를 맞춘다. 체계는 효율을 향해 설계되고, 우리는 그 효율의 결과를 적당한 가격으로 매일같이 소비한다. 좋고 나쁨의 판단을 미뤄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확한 계산과 꾸준한 손길이 멈추면, 우리 식탁은 곧 비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