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현관에 박제된 내 사진 (2)
베트남에서 회사를 옮기고 새로운 팀을 꾸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베트남의 남부는 사계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그냥 흘러버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과거를 떠올리면 '그때, 첫눈이 오던 날', '단풍이 지던 그날', '벚꽃 구경 가던 때'라는 말로 자연스레 시간을 떠올릴 수 있지만, 여기 베트남 남부에서는 일 년 내내 같은 풍경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시골의 국도변을 달리는 이 풍경은 계속 똑같다. 길 양쪽으로는 끝없이 고무나무가 같은 간격으로 서있고, 하늘은 윈도우 배경화면처럼 파랑이며, 햇빛 가리개를 하지 않으면, 선팅을 한 차 창도 따끔하게 따뜻하다. "우리, 이 거래처와는 진짜 오래 만난다. 그치?" 나는 내 앞자리, 그러니까 운전기사 오른편에 앉은 통역 직원 투(Thu)에게 이 거래처를 처음 만난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네요. 처음에 법인장님하고 이 대리점의 사장님을 만나서는, 그분이 이 지역 협회장이라는 말에 속았었잖아요." 우리는 함께 5~6년 전의 그 일을 떠올리며 한참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사장님은 아직도 예전에 법인장님이랑 찍은 사진을 계속 현관에서 떼지 않고 있대요." 나도 다른 회사 영업 사원에게 들은 말이긴 했다. 처음 이 대리점과 거래를 한 뒤에, 이 사장님은 나와 둘이서 찍은 사진을 아예 본인 집 현관을 뜯어내고서 파묻었다. 그리고 내가 회사를 옮긴 뒤에, 그 사장님도 다른 회사로 거래를 바꿨는데, 여전히 내가 그 집 현관에 걸려있다고 했다. "응, 나도 들었어. 그 사장님은 예전의 우리 회사와 거래한 게 아니고, 내가 있던 그 회사랑 거래한 건가 봐." 내가 말을 하고도 피식하고선 살짝 웃긴 했다.
이 사장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는 1년 정도가 지났다. 이곳은 내가 그전 회사에서 처음으로 내가 관여되어 만들었던 거래처였고, 퇴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방문을 했던 거래처도 여기였다. 그날, 대리점 사장님이 여느 때처럼 보양식을 준비했다며 술을 마시고 가랬는데, 다른 일정 때문에 어렵다고 뿌리치고 나왔었지. 그렇게 1년 만인 오늘, 이 나이 많은 허풍쟁이였던 사장님은 나를 다시 만나자마자 양손을 잡고, 또 끌어안기도 했다.
"이 술 뭐예요?" 대리점 사장님이 잠깐 기다리라며 방으로 들어가서 한 손에 시바스리갈 한 병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술 병에는 두꺼운 매직으로 내 이름과 날짜가 쓰여 있었다. "이거 임 법인장 오면 마시려고 계속 들고 있었어." 그렇게 이 날 나와 이 사장님의 사진이 크게 걸린 베트남의 시골집 현관 앞에서, 작은 테이블과 선풍기를 틀어 놓고선 시바스리갈을 끝까지 마셨다.
그리고 다시 3개월쯤 지났다. 나는 베트남에 처음 진출하는 한국 회사의 설립과 관련한 업무로 호치민 시내의 사무실에서 행정업무로 바쁜 날들을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투(Thu)에게 연락이 왔다.
[법인장님, 그 대리점 사장님이 어제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호치민의 한 대형병원으로 실려왔답니다.]
너무 놀라 바로 다음날 투(Thu)와 함께 호치민의 병원을 찾았다. 우린 커다란 정관장 홍삼 선물 세트를 들고 종합병원 병실로 찾아갔다. 키가 작은 중년의 아들과 딸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플라스틱 의자 2개를 대리점 사장님 옆에 놓고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회원이 2명밖에 없는 협회를 차려놓고 자기가 이 지역 협회장이라고 허풍을 떨던 풍채 좋은 사장님은 얇은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워있다. 우리에게 반갑다는 손짓을 했다.
"그래도 말을 할 수 있네요. 다행이에요." 병원으로 실려 온 어제까지만 해도 말을 잘 못했다는데, 이제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단다. "응. 그런데 아직 왼쪽 팔이 안 움직여." 웃는 듯 마는 듯 표정을 지으며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무언가 말보다 더한 것을 전해주고 싶어 했다. "이제 말도 잘하시니까, 팔도 좋아질 거예요. 사장님, 내가 교회 엄청 열심히 다녀요. 내가 하나님한테 기도할 테니까 이거 홍삼도 드시고, 좋은 치료받아서 나으면 돼요." 수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활기차던 이 사장님의 허풍과 롯데호텔의 회의실에 일어서서 발표하던 장면들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어제 실려오셨는데, 응급실 옆자리에 투(Thu)가 있다고 옆자리로 가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투(Thu) 목소리가 들린다고, 빨리 가서 불러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진짠가 싶어서 정말로 옆자리에 가보고, 옆 병실도 가봤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랬더니 그러면 투(Thu) 친척인 것 같으니까 곧 투(Thu)도 올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30대 중반의 딸이 어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투(Thu)는 사장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 대리점 사장님은 시골에서 호치민으로 오니 투(Thu)가 생각났는가 보다. 감사한 일이라고 투(Thu)와 함께 병원을 나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호치민을 떠올리면 투(Thu)가 생각나는가 보다.
앞으로 나도 이 장소를, 또 이 시간을 그렇게 기억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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