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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ul 31. 2021

싸인 끝이 위로 솟아야 성공한대

그래도 난 좀 다르게 살고 싶어

이제 회사에 입사한 뒤 보름 정도 지났는데, 아직도 인사팀에서 이것저것 서류를 요구하고 있다. 입사 전에도 했었는데 적성검사도 다시 하자고 하고, 은행 계좌, 각종 서약서, 동사무소에서 떼와야 하는 서류들을 계속해서 요청하는 중이다. 그나마 인사팀에서 서류를 요청하는 직원이 나랑 동갑이라 편하게 해주고 있다. 여자 직원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회사에 입사해서 벌써 5년 이상되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랑 동갑인 직원이 처음 입사했다고 매일 찾아와서 말도 걸어주고, 회사 생활에 대해 알려주기도 한다.


하루는 부서에서 사수한테 업무를 배우고 있는데, 동갑내기 그 인사팀 직원이 커피를 한잔 들고 나한테 걸어온다.


"미안, 김대리님꺼는 안 가져왔는데, 이따 우리 팀으로 오면 한잔 줄게요. 이건 신입사원 꺼." 나한테 커피를 건넨다.

"와! 이거 너무하네. 뭐 이제 신입만 챙겨주는 거야?" 김대리가 씩 웃으며 볼멘소리 하듯 말을 한다.

"이거 김대리님 드세요." 내가 이렇게 사수한테 얘기는 했지만, 김대리는 손사래를 치며 일어선다.

"아니, 됐어. 내가 그걸 왜 마시냐? 나 담배 피우러 갔다 올 테니까 둘이 커피 드시면서 편안하게 대화하세요."


역시 인사팀 직원은 나한테 또 요청할 게 있어서 찾아온 거였다. 나한테 싸인이 있냐고 묻는다. 


"아니, 없는데."

"그치? 이제 막 학교 졸업했는데 싸인이 어딨겠어? 근데 이제 하나 만들어야 돼. 전산에 등록해야 되거든. 여기 빈 종이에다 좀 몇 개 해봐."


싸인을 만들어야 된다니까, 뭔가 정말 직장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렇게 하면 되나?" 그냥 내 이름을 좀 갈겨써 보여줬다.

"와! 미쳤네. 자기가 뭐 대통령이야? 그냥 이름 석자만 딱 쓰고. 캬! 뭐 대통령 싸인이네. 김대중, 노무현도 이렇게 쓰긴 하더라."

"다시 만들까?"

"그럼 다시 해야지. 이제 직장도 다니는데 평생 쓸 거 하나 만들어봐. 내일까지 만들어서 보내줘."


그러면서 싸인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몇 년 전에 대표이사가 유명한 사람한테 듣고 왔는데, 싸인 끝이 하늘로 솟아야지 성공한다고 말을 듣고서 다른 임원들한테 전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후에 우리 회사 임원들이 다 싸인을 바꿔서, 지금 보면 모두 싸인 끝이 위로 올라가 있다는 말을 전해준다. "이건희 싸인도 봐봐. 위로 올라가 있어. 그치? 그러니까 새로 만들 때 잘 만들어야 돼. 그래야 성공한다니깐. 아무튼 위로 올리는 거 잊지 말고 내일 꼭 보내줘."


인터넷으로 찾은 이건희 싸인을 보니, 의도를 갖고 위로 올린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끝이 위로 올라가 있긴 하다. 그리고 우리 임원들 싸인은 하나같이 하늘로 솟구쳐 끝나 있는 걸 전산 화면에서 확인했다. 



다음날. 새로 만든 싸인을 들고 인사팀으로 들어갔다.


"싸인 만들었어?"  

"응 만들었어. 여기." A4용지 절반 정도의 크기로 새로 만든 싸인을 건넸다.

"엥? 뭐야? 끝이 내려가 있네? 내가 어제 올리라고 했잖아?"

"응. 내 이름은 아래로 내려가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살면서 듣는 여러 미신스러운 얘기들이 많다. 성공에 대한 집착, 그리고 불운을 방지하고 싶은 마음이 사람들을 더욱 이런 것에 매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난 일부러 더 반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성향이 원래 좀 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성공 여부를 서명이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건희 싸인은 아래로 내려가는 버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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