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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Aug 23. 2021

갑작스런 현지 방송 인터뷰 성공기

현지 직원들에게 인기 얻는 방법

베트남의 한 방송국에서 주관하는 직장인 풋살대회가 있다고 거기에 출전해서 회사 이름도 알리고, 직원들 단합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언뜻 생각하기에 예전에 한국에서도 있었던 직장인 줄넘기 대회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좋은 기억이 있어서 베트남에서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출전 신청해봐." 이렇게 매니저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로부터 약 1개월 뒤, 우리 회사가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대회 전에 방송국에서 각 회사 대표들 인터뷰가 있으니까 미리 준비를 해달라고 한다.


"어? 인터뷰? 베트남어로 해야 돼?" 총무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한국어로 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총무 매니저가 미리 다 알아놨다면서 대답을 한다.

"그럼, 내가 미리 인사말 써서 보내주면 되는 거지?"

"네. 그렇게 하시면 다 번역해서 밑에 자막으로 띄울 예정입니다."

"OK. 내일 하나 써서 보내줄게."

"Yes, sir. 1분 정도 분량으로 써주세요."


그리고 인터뷰 전날 퇴근 무렵, 총무 매니저가 찾아왔다. 내일 아침 10시에 인터뷰니까 옷 깨끗한 거 입고 출근해달라는 말을 전한다. 걱정 말라고 하며 나왔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다음날 아침 잘 다려놓은 흰색 셔츠에 재킷, 그리고 회사 배지까지 달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출근하는 차 안에서 좀 자려고 하는데 계속 전화가 온다. 총무 매니저였다. "법인장님, 이따가 베트남어로도 인터뷰 가능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엥? 갑자기 무슨 말이지?'


아무튼 회사에 도착하니 총무 매니저가 A4 용지 2장을 내민다. 베트남어로 15포인트 정도로 크게 쓴 인터뷰 대본이다. 내가 쓴 한국어를 통역 직원이 다시 베트남어로 번역해서 써놨다고 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아니, 지금 8시가 넘었잖아. 그리고 인터뷰는 10시고... 근데 지금 이걸 베트남어로 외우라고?"

"오늘 아침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국어로 인터뷰를 하고, 베트남어로도 한번 더 인터뷰를 하고 싶답니다."

"엥? 갑자기 바꾸면 어떡해?"

"아마 한국어로 방송은 나갈 것 같고, 혹시 베트남어로는 인터뷰가 어떨지 한번 보기만 하겠답니다."

"그럼, 일단 한국어로도 하는 거지? 베트남어는 책상에 깔아 두고 보면서 할게."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미리 좀 읽어보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인터뷰 당일에 스케줄을 바꾼 것이 못마땅했지만, 여기서 일하면서 이런 식의 일정 변경을 수차례 겪어 봤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매니저들이 이렇게 신나는 표정으로 적극적으로 내 옆에 붙어서 발음 교정을 해주고 있으니까 한번 해보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오기로 한 시간까지 총무 매니저 그리고 한국어 통역 직원과 함께 맹연습을 했다. 인터뷰 시작 시간인 10시 무렵이 되어선 첫 페이지 절반 정도는 그냥 외울 수도 있게 되었다. '진작에 베트남어로 해달라고 했으면, 미리 연습해서 다 외웠을 텐데...'라는 원망도 했지만, 어쨌든 시간이 다 됐다.




방송국에선 방송용 카메라를 든 운동복 입은 젊은 남자 한 명과 인터뷰를 진행할 마이크를 든 남자 한 명이 회사로 방문했다. 사무실에서 간단히 인사한 뒤에 자기들끼리 촬영 구도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다. 내 책상 뒤에 있는 책장의 구성을 바꾸기도 하고, 책상의 위치도 살짝 돌려서 방송에서 보기에 좋은 구도를 만들어 두었다. 나를 인터뷰할 사회자는 자기 손바닥에 물을 뿌리더니 내 머리를 꾹꾹 누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게 맘에 든다는 표정으로 이제 촬영해도 좋다는 사인을 카메라맨에게 보낸다.


내 책장을 배경으로 둘이 일어선 채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시나리오에 쓰인 대로 진행자는 베트남어로 묻고 나는 한국어로 대답을 했다. 우선은 회사 소개를 간단히 하고 그다음에는 왜 이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간단한 인터뷰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친뒤에 방송국이 요청한 대로 베트남어로도 똑같이 대답을 해달라고 한다. 이번엔 책상에 앉아서 하기로 했다. 내가 A4용지를 책상에 깔고 얘기하니까, 시선이 너무 아래쪽으로 가있다면서 내 노트북 모니터에 붙이고 책상에 펼쳐 두자고 한다. 아무래도 모니터가 멀어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첫 페이지는 그럭저럭 외우기도 해서 잘 넘어갔는데, 둘째 페이지는 중간에 글자가 잘 안 보여서 멈추고 다시 진행하기도 했다. 총 3번 베트남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나자 우리 직원들이 "오~" 이러면서 나한테 다가온다. "왜? 잘했어?" 직원들에게 베트남어로 물었다. "진짜 잘했습니다." 직원들이 베트남어로 대답하며 엄지척을 해준다. 그런데 그냥 빈말로 그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베트남어로 말을 하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읽어나간 거였다. 한국어로 1분도 안 걸린 인터뷰를 베트남어로 5분은 얘기한 것 같다. 인터뷰 내내 계속 말을 더듬어대느라 아무런 정신도 없었다. "어차피 한국어로 인터뷰한 게 나올 거야."라고 얘기하자 그럴 수도 있지만 연습보다 잘했다고 통역 직원이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덕분에 재밌는 경험 했다. 모두 고생했어." 이렇게 인터뷰를 종료했다.




호찌민에 있는 우리 집엔 베트남 TV 방송이 안 나온다. 아예 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신청도 하지 않았다. TV로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밖에 보질 않는다. 그래서 인터뷰 한 내용이 방송에 나온다고 한 날에도 실시간으로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다음날 직원들이 회사에서 보여줬다. 그날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입구에서 내 방으로 들어가는 길까지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서 나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와! 이게 웬일이야? 베트남어로 인터뷰한 게 나왔네?' 화면에 나온 나를 보는 게 어색하기도 했지만, 베트남어 인터뷰 버전이 방송됐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베트남어로 갑자기 인터뷰했는데 진짜 이게 TV에 나오다니...' 직원들에게 계속 물어봤다. "알아들을 수 있어, 내 베트남어 발음을 알아듣겠어?" 직원들이 대답하기를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직원이 와서 얘기했다. "못 알아들으면 자막이 나왔겠죠. 여기엔 자막이 없잖아요." 그 직원 말대로 내 인터뷰 화면 하단엔 자막이 없었다.


방송국이 일처리가 뭐 이렇게 갑작스럽냐고 불평하며 베트남어로 인터뷰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 인터뷰를 통해, 베트남어를 할 수 있는 법인장과 베트남 직원들 간 인간적인 간격이 조금은 더 줄어든 것 같다. 이날 우리 직원들은 날 보면 모두 즐거워했고, 내가 나온 인터뷰 동영상 URL을 SNS에 공유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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