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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Dec 19. 2021

베트남 공안에게 조사받던 날

실망하고 또 감사하고

연초부터 문제가 생겼다. 지난해 코로나 때문에 거래처 직접 방문과 우편 발송이 어려워진 사이를 틈타 영업 매니저 한 명이 거래처와 회사를 속여가며 서류를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 일로 회사에 손실이 발생하였고, 당장 영업 매니저를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푸른색 포드 픽업트럭을 몰고 회사로 들어온 영업 매니저는 인사 담당 매니저와 함께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경위를 설명하라는 요구에 처음부터 발뺌이다. 여러 부서의 직원들 증언과 거래처 사장의 확인 서류가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매니저는 내가 처음 베트남에 왔던 때인 5년 전 우리 회사의 영업부서에서 근무하던 20대 후반의 직원이었다. 영업사원 중 거의 막내였고, 키도 제일 작아서 또 다른 두 명의 키 작은 영업사원과 함께 숏다리 삼총사라고 불리던 재밌고 활기찬 영업사원이었다. 회사 매출이 좋지 않던 시절부터 함께 근무했었고, 영업부 회식을 할 때면 청바지 차림에 회사 로고가 크게 새겨진 판촉용 푸른 셔츠를 입고선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가와서 인사하던 직원이기도 했었다. 또 가끔씩 보면, 본인의 작은 혼다 오토바이에 제품을 가득 싣고 거래처에도 직접 배달하며 성실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기억도 있다.


몇 년 후, 회사의 매출 실적이 좋아지면서 추가로 개설되는 영업 지역에 누구를 매니저로 보낼지 고민을 하다가 이 직원을 매니저로 진급시켜 새로운 영업 지역의 책임자로 발령 내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지역에서 용케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고 판매를 늘려가고 있었기에 영업회의 시간에 몇 차례나 일으켜 세워 칭찬을 했었고, 영업 성과로 인해 여러 차례 시상금을 받아가기도 했던 직원이었다.



그러던 그 직원의 얼굴이 지금 내 앞에서 싹 변했다. 할 테면 해보란 식으로 씩씩거리며 본인은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인사 담당 매니저도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영업 매니저는 오히려 인사 담당 매니저를 향해 비웃음을 보이고 있다.


"안 되겠다. 지금 얘기가 계속 바뀌고 있잖아!" 나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말 바꾼 적이 없습니다." 영업 매니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대꾸한다.


"다시 처음부터 얘기하자고. 이번엔 녹음하면서 다시 말하자."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다시 처음부터 사건 경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조금 차분해진 후에 지금까지 한 얘기를 토대로 경위서를 작성한 뒤 나가라고 지시했다. 그 후에 인사 담당 매니저는 내 방을 나갔고, 영업 매니저는 내 방 테이블에 앉아 경위서를 작성했는데, 내용이 뒤죽박죽에다가 앞뒤가 맞지도 않는다.


사안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인사 매니저와 함께 징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했고, 징계위원회 개최일을 문서로 고지하기 위해 그 영업 매니저가 있는 자리에서 징계위원회 개최 공문을 발급해 주었다. 그 후 영업 매니저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아침에 출근해서 옷걸이에 재킷을 걸고 있는데 인사 담당 매니저가 나에게 보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베트남 공안에서 회사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우리 회사의 영업 매니저가 회사 사장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는 고소 사건이 회사 근처의 공안에 접수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사장인 내가 피고소인이기 때문에 회사로 찾아와 조사를 하겠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


한국 경찰한테도 조사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는데, 베트남 공안에게 조사를 받게 생겼다. 그리고 폭언과 폭행은 대체 무슨 말인가? 인사 담당 매니저가 추가 정보를 얘기해주는데, 그 영업 매니저는 경위서를 쓰던 날, 정신 병원에 방문하여 진단서도 끊었다고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인사 담당 매니저가 놀란 나의 표정을 보며 다시 말을 건넸다. "사장님 방에 CCTV 달려있는걸 그 영업 매니저가 모르는 것 같네요." 그래! 매니저의 말이 맞았다. 내 사무실에는 CCTV가 달려있다. 내 방에 금고가 있기 때문에 그걸 지키기 위해서 달아두었다. 영업 매니저가 폭행을 당했다고 하는 시간의 CCTV 영상은 이미 확인해보았는데, 그런 영상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당연하지. 내가 폭행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그날 오후, 내가 피고소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노조위원장과 경비가 찾아왔다. 노조위원장은 우리 사장이 평상시에 직원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 노조원들도 한 번도 폭언과 폭행을 당해본적이 없다는 서류를 작성해 가지고 왔다. 그리고 경비는 그날 본인이 창밖에서 내 사무실을 지켜봤는데, 폭행과 같은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며 진술서를 작성해 주겠다고 했다.


너무 가슴 뭉클하고 감사했다. 베트남의 직원들과 경비가 본인들의 수고를 들여가며 한국인인 나에게 유리한 서류를 작성해 주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분하고 화나던 감정이 누그러지고 오히려 힘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 공안이 회사에 방문하던 날, CCTV 영상과 노조위원장의 진술서, 또 경비의 진술서를 가지고 공안을 만날 수 있었고 여러 차례의 진술 과정을 통해 폭언과 폭행에 대한 사건은 종결되었다.


한 사람을 인정하고 키워주면서 더욱 발전하길 바랬는데, 그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분노하고 억울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것 같던 고마운 사건이었기도 했다.




그 후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며칠 전, 영업 사원들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 영업 매니저는 징계위원회에 변호사를 대동할 것 같으니, 내가 미리 준비해야 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회사 징계위원회에 변호사를 대동하다니?' 이런 경우는 한국에서도, 또 베트남에서도 처음 봤고, 다른 회사 사례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던 경우다.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고 영업 사원들에게 얘기했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징계위원회가 열리던 날, 그 영업 매니저는 푸른색 포드 픽업트럭을 회사 주차장에 세우고 본인의 변호사를 대동한 채 당당히 사무실 2층 대회의실로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커다란 회의실 문을 열고서 멈칫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회의실 안에서는 나와 인사 담당 매니저, 노조위원장, 그리고 이미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증거자료까지 확보한 베트남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세명이 내 옆에 함께 앉아 그 영업 매니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영업 매니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징계위원회의 결정과 업무상 문서 위조 내용을 시인하는 모든 서류에 서명을 했고, 현재 그는 베트남 공안에서 사문서 위조와 추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처음 내 사무실에 불려 와서 사건 경위를 확인하던 날에 그 영업 사원이 제대로 잘못을 시인했다면, 또 나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무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징계위원회가 열리던 날에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면, 나는 베트남 공안에 그를 신고하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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