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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an 03. 2022

베트남 귀신은 한국말을 모른다

이야기가 되어 이승에 남게 된 사람들

"퇴근 안 하세요?" 퇴근시간 무렵 회계팀의 한 베트남 여자 직원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건넨다.

"아! 나는 아직 일이 남았어. 조금 더 일하고 퇴근할 테니까 먼저 들어가." 


우리 회사는 베트남 시골 지역에 위치해있어서, 주로 도심지에 사는 관리 부서의 직원들은 통근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그래서 모두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업무를 마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 단독으로 출근하거나 퇴근하기에는 이용할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다. 그 거리에 해당하는 편도 택시비는 베트남 일반 스태프급 직원 월급의 1/10 이 넘으니 거의 불가능한 경우라고 생각되고, 본인이 직접 오토바이를 운전해서 오고 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나는 별도로 내 업무용 차량이 있기 때문에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출퇴근에는 베트남 직원들에 비해 자유롭고, 또 오늘은 한국으로 보내야 하는 보고서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야근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사무실에 혼자 있으면 귀신 나와요. 일찍 들어가세요." 회계팀의 여자 직원은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다시 말을 한다.

"정말?" 나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를 해줬다.

"네.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2층 서고에서 여자 귀신이 노래 부르고 있었다고. 무서워요."

"그래? 근데 귀신이 왜 노래를 하고 있지?"

"몰라요. 웬 여자 귀신이 아오자이 입고선 창가에서 노래 부르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화내고 소리친대요."

"신기하네. 아무튼 나는 베트남 말 잘 못 알아들으니까 귀신이 화내다가 답답해서 그냥 가지 않을까?"

"하...... 진짜예요. 여기 귀신 많아요."

"하하. 알았어. 나도 늦기 전에 일 마치고 퇴근할 테니까 내일 봅시다."


베트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자 사진. 시골 호텔방에 가면 침대 위에 아오자이 입은 여자 그림이 종종 걸려있는데, 불 끄고 자려고 하면 좀 무섭다.


그렇게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는데, 왠지 오싹하다. 창밖은 이미 깜깜하고,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 사이로 산업단지 외곽을 달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만 이따금 들리는 정도다. 우리 공장 근처에는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있는데, 이 묘지 때문에 직원들이 더 귀신 얘기를 자주 하는 것 같다. 그쪽 방향 창문으로 다가가서 블라인드를 위로 걷어 올렸다. 공장 정문의 경비실 창문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고, 날이 더운지 푸른색 경비복의 단추를 다 풀어헤쳐서 뱃살이 훤히 보이는 경비 한 명이 경비실 밖으로 의자를 끌고 나와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얼마 전에 생산부의 공무팀장에게 들었던 귀신 얘기가 다시 생각났다. 공무팀장이 야간 근무가 있던 날에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좀 빠르게 마치고 미리 작업 준비를 하려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기보다 먼저 밥을 먹고 벌써 일하고 있는 직원이 있었다고 했다. '누가 이렇게 빨리 들어왔지?' 하고 다가갔는데, 우리 직원이 아니라 웬 귀신이 앉아서 우리 작업도구를 만지작거리고 있길래, 혼비백산해서 공장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한다. 아마 군복 같은걸 입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이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같이 전해주었다.


"우와. 말이 돼? 진짜 군인 귀신이 있었다면, 우리 직원들이 하도 일을 안 하니까 좀 도와주려고 했나 보네. 일 좀 열심히 해봐."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웃으며 이렇게 대꾸해줬다. 그 공무팀장이 나에게 말하려는 요지는 귀신이 공장을 해코지할 수 있으니,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제사 지낼 돈이 필요하니 회사에서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말을 꺼낸 것이었다. 


별도로 회사에서 지원해주지 않겠다고 대답해줬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귀신한테 제사를 지내냐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다 보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다 귀신 탓을 하면서 제대로 된 원인을 찾지 않으려고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출근했는데, 회사 공터에서 제사 지낸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직원들 몇 명이 자체적으로 새벽에 몰래 제사를 지낸 것 같긴 한데, 그냥 모른척하며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묘지


아까 귀신 조심하라며 퇴근하던 직원 때문에 갑자기 얼마 전에 들었던 공무팀장 얘기도 생각나고, 경비실을 지나 희미하게 보이는 공동묘지도 떠올라서 분위기가 더 오싹하다. 그런데 한국에 보낼 보고서가 끝나질 않는다. 생각만큼 빨리 일이 진행되지는 않고 괜히 더 피곤한 것만 같다. 물 한잔 마시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직원들이 사무실 밖에 있는 복도의 불을 다 끄고 퇴근했다. '아! 이건 왜 또 다 끄고 갔어.' 마흔 살이 넘었는데도 이럴 땐 아직도 무섭다. 깜깜하긴 한데, 불을 켜자니 스위치는 또 화장실 반대 방향에 있어서 켜러 가기가 귀찮기도 하고, 왠지 내가 지는 느낌이라 그냥 화장실로 후딱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복도 끝의 왼편에 있는 남자화장실로 90도 턴하며 딱 들어갔는데, "헉!"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청 크게 소리를 지른 건 아니고, 깜짝 놀란 숨소리가 입 밖으로 나온 정도였다. 역시 불이 꺼져있는 어두운 화장실 안에는 내 운전기사가 핸드폰을 켠 채로 서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직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고, 운전기사도 날 보고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뻔했다. 




베트남엔 귀신 얘기가 많다. 직원들은 아직도 종종 회사에 있는 귀신 얘기를 한다. 어쩔 땐 집에서 귀신을 봤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이 건물을 지을 때 땅을 팠더니 전쟁 때 죽은 시체가 무더기로 나왔다느니, 이 공장터가 원래 공동묘지 였다느니, 이런 종류의 얘기를 많이 하곤 한다.


나도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우리 학교가 원래 공동묘지였다는 얘기는 초중고를 다니는 내내 들었던 것 같고, 6.25 때 이 지역에서 전사자가 많이 나와서 우리 부대에 귀신이 많다는 얘기를 새벽에 보초 서며 군대 선임에게 듣기도 했다. 베트남은 1975년까지 베트남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당시를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통해 귀신의 모습으로 이승에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릴 적에 많이 들었던 귀신 이야기는 무섭지만 재밌었다. 학교 앞 서점과 문방구에서 파는 무서운 이야기 책은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핫한 아이템이었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서로 알고 있는 귀신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하기도 했었다. 요즘도 이런 귀신 이야기가 인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 생각엔 요즘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무섭고 재밌는 이야기는 6.25 때 죽은 군인이나 처녀 귀신이 아니라 좀비나 괴물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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