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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un 03. 2023

모든 것이 의미가 되는 날

[소설] 비 오는 나라_1

무겁고 어두운 저 구름은 이제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속으로 겨우 머금어 버티던 그 어두운 무게를 이제는 다 놓아버려야 할 것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검은색 블라인드가 올려진 나의 오른편 차창으로는 해가 지고 있다. 어두운 비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구름 뒤로 뭉개지는 노란 태양. 이는 넓은 사이공 강 뒤편 높은 빌딩들 사이에 걸쳐 있다.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의 창밖으로 계속하여 변하는 회색의 풍경 속, 저 일그러진 그리고 눈부신 태양은 계속 같은 자리를 유지한다. 나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구름과 건물과 태양을 바라보며 서글프고 조용한 눈물을 흘린다. 앞에 있는 운전기사에게 이 모습을 들킬까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기사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내 다물어진 입에서 새어 나는 소리를 막을 수 없다.


내가 타고 있는 검은색 카니발은 비에 젖은 아스팔트같이 어둡고 얇게 빛나는 사이공 강을 조용히 건넌다. 출퇴근을 위해 매일 넘는 이 푸미(Phu My) 다리 위에서,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여기 베트남에서 지금껏 지내온 7년이라는 시간, 이 모든 것이 부정되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주재원으로 나와서 책임지고 있던 이 회사도, 또 내 삶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하지? 본사에는 어떻게 말을 꺼내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저 해프닝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며 애써 기대했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진정되지 않는 나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의도적으로, 그리고 오랜만에 찬송가를 듣고 있다.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나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오늘 아침 9시. 동나이(Dong Nai) 성에 있는 회사 근처 짱봄(Trang Bom) 현의 지방 법원 판사와 약속을 잡았다. 어제 퇴근 무렵, 갑자기 회사의 은행 계좌가 동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행 측에서는 법원의 명령으로 회사의 계좌가 동결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을 아는 직원들이 없었다. 은행의 설명에 따르면, 간단히 기재된 법원의 명령서에는 회사가 회사의 직원 2명에게 지급하지 않은 돈이 있어서 계좌가 동결되었다고 한다.


융(Dung) 그리고 르엉(Luong)이라는 서류에 적힌 두 명의 이름을 확인한다. 이 두 명은 회사의 법률팀 직원들이다. 그 둘은 전날 오전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오후에 나란히 출장을 나가서 복귀하지 않고 있다. 연락도 되지 않는다. 휴대폰은 꺼져있고, 모든 SNS는 탈퇴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찾아가도 아무도 없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하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저 착오에 따른 해프닝일까? 아니면 심각한 문제로 번질 것인가?'


전날 저녁 내내 관리부서 직원들이 여러 곳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뒤에, 그 계좌 동결 명령서를 작성한 짱봄(Trang Bom) 현의 지방 법원 판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9시에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더운 날씨 탓에 평소에는 얇은 바지와 와이셔츠만 입고 출근하지만, 오늘은 정장 재킷까지 입고 출근했다. 이번에 처음 방문하게 된 짱봄(Trang Bom) 지방 법원은 사무실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낡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진한 노란색 페인트로 시멘트 외관이 칠해져 있고, 창문은 모두 유리가 없이 짙은 고동색의 나무로 되어있다. 정말 초라해 보이는 시골 관공서 느낌이 난다. 나는 회사의 부사장, 총무 매니저, 그리고 통역 직원과 함께 방문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빠른 오전 8시 45분에 법원에 도착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채로 1층에 있는 3개의 출입문 중에서 중앙의 커다란 문을 통해 법원으로 들어간다. 가운데 문을 이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선 법원의 1층 바닥은 예전 한국의 고속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매끈하게 닦아놓은 시멘트 바닥이다. 어려서는 이런 바닥을 보면 시장에서 파는 순대 무늬가 난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오랜만에 다시 그런 바닥을 보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회색의 어두운 시멘트 바닥 중간에 흰색 돌 같은 문양이 별사탕처럼 가끔씩 박혀있기도 하다. 이 어두운 법원의 바닥을 깊게 그리고 무겁게 눌러 밟으며, 한걸음 한걸음에 오늘의 모든 일들이 잘 해결될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다. 1층에서 만난 법원 직원에게 우리가 만날 판사의 사무실을 물어보니 2층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커다란 중앙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왔다. 아직 판사는 출근 전이다. 그를 기다리기 위해 어두운 2층 복도에 있는 응접 테이블에 함께한 회사 직원들과 같이 앉았다. 시멘트로 만든 동그란 응접 테이블 위에는 역시나 시멘트로 만든 주황색의 커다란 화분이 놓여있었는데, 그 화분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서양란과 이름 모를 노란 꽃이 꼽혀있다. 이 커다란 화분 때문에 내 맞은편의 시멘트 의자에 앉은 직원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앉아 9시가 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9시 15분이 되어도 판사는 출근하지 않는다. 판사의 비서를 찾아갔다. 판사에게 지금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외부 일정이 있어서 10시에 출근하겠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전한다. "판사가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판사도 이 사건에 개입돼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직원들이 나에게 의견을 주었다. 베트남의 공무원들은 뒷돈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일이 어떻게 튈지 예상치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다. '어디선가 돈을 받고 우리 회사에 이상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지? 또는 그런 이유로 일부러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하는 베트남 공무원에 대한 직원들의 의심이었다. "어쨌든 우린 오늘 그 판사를 만나서 내용 확인을 해야 되니까 계속 기다려보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정보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우리 회사 계좌가 동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이버 앱을 눌러본다. 스승의 날, 그리고 5.18 관련 뉴스들이 여럿 올라와 있는데, 기사를 확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회사 계좌는 동결되어 있다.'는 생각만 든다. 유튜브 앱도 들어가 본다. 최근까지 많이 보던 예능 프로그램들이 주욱 올라와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누를 수 없다. '지금 회사 계좌가 동결돼 있다.' 새카만 머릿속이 아무런 정보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 시골의 지방 법원에는 실내에 에어컨이 없다. 원래대로라면 베트남 남부 지역에 우기가 이미 시작됐어야 하는데 세계적인 이상기온으로 올해는 몇 주 더 늦어지는 것 같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 지금이 가장 더운 시기다. 며칠 전에는 호치민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 더위로 쓰러졌다는 어느 한국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정장 재킷을 입은 채로 앉아있다. 긴팔의 하얀 와이셔츠에 땀이 기 시작하지만 재킷을 벗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재킷을 벗으면 중요한 한 의미가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정말 오랜만에 성경책 앱을 눌렀다. 성경을 읽는 것이 나에게, 또 이 상황에 긍정의 의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약 성경의 '사사기'를 눌러 읽기 시작했다.


10시 30분이 되어도 판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판사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알게 된 회사의 매니저들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처음 몇 번은 연결이 되지 않다가 3, 4번 만에 연락이 닿았다. 조금 더 늦을 것 같으니 법원 앞의 카페에 나가 있으라고 한다. 우리는 나가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재킷을 입고 푹푹 찌는 법원 복도의 시멘트 의자에 앉아 성경책을 읽고 있다. 사사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나도 가만히 눈을 감고 여호와께 물었다. '하나님, 이 일이 대체 무엇입니까?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약속시간보다 2시간 30분이 경과한 11시 30분, 드디어 판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날씬하고 키가 작은 베트남의 시골사람처럼 생긴 남자였다. 90년대의 교장선생님처럼 네모난 금테 안경을 쓰고 있는 그는 거의 정오가 될 무렵에 샌들을 신고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법원 중앙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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