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만의 아픔의 깊이가 너무 깊어
구렁텅이에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가능한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문득,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동안 몸이 가난을 기억해 양손 가득 바리바리 잡고만 있었다. 가난을 기억하다 못해 억울했는지 아주 많이도 사모았다. 마음이 허해서 그런지 원 없이 못 산 한인지 취업을 해서 내손으로 돈을 벌 때쯤 물건을 사고 또 사면서 물건들로 위로받았다. 세 살 버릇여든 간다고 결혼해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시든 꽃이라든지
인테리어 소품이던지
옛날 편지라던지
다 먹고 모아둔 잼병이라던지
살 빠지면 입겠다고 모아둔 44,55 사이즈 옷이라던지
가수들 cd던지
취미생활용품이라던지
언제 쓴지도 모르는 모든 물건,
이고 지고 갈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사모았는지.
중구난방으로 내 집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내가 가져가지 못함이 느껴졌다.
가져가지 못한다면
가져갈 수 있는 것/가져갈 수 없는 것/남겨줄 것을
구별해야 했다.
죽은 뒤 남은 물건은 유품이지만
살아있을 때 전달한 물건은 선물이다.
"적금이 해지되었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고 맨 처음 한일이었다.
적금통장
보험증서
부동산 계약서
순금들
인감도장 등
나에게 우선순위는 '돈' 이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이 돈으로 치사해지지 않기 위해
남겨진 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싶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죽은 이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는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 씨'
드라마 '도깨비'에서
텅텅 빈 냉장고 좀 채워달라는 죽은 수험생의 부탁.
그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은 내가 직접 정리로 했다.
그중 제일은 적금을 해지했다.
솔직히 말해, 비상금이었다.
그 돈을 보태 10년 넘게 타던 차를 바꿨다. 인생 덧없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으니 바리바리 잡고 살던 내가 안쓰러웠다. 명절에 양가를 갈라치면 1000킬로를 달리고 달려가는 길, 고속도로에서 가드레일만 보고 갔던 그 지루했던 시간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반떼에서 SUV로 차를 바꿨다. 신세계였다. 가드레일 대신 풍경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저 멀리 앞서가는 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험증서, 인감도장, 부동산 계약서 등 중요서류는 가방 하나에 모두 모아 두고,
남편에게 틈만 나면 비밀번호나 보험 서류가 안방 장롱 가방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아이에게는 '엄마는 항상 너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일러두었다.
미니멀 라이프 (minimal life)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갖추고 사는 생활.
미니멀리즘(minimalism)
미니멀리즘은 가장 단순하고 간결함을 추구하여 단순성, 반복성, 물성 등을 특성으로 절제된 형태 미학과 본질을 추구하는 콘셉트다 (발췌:네이버 지식백과)
1. 내가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2. 나는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3. 남겨진 자들에 대한 예의는 무엇인가?
1번에 대해 '돈'이 가장 우선순위의 가치라고 여겼다가
2번에 대해 생각하니 돈만 우선으로 생각하면 뼈저리게 후회할 것 같아서
3번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보니 '추억'이라고 정했다.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을 함께하고 그것을 추억 삼아 남겨진 자들이 추억을 회상하면서 살아갔음 했다.
모든 곳에 깃든 나와의 추억이 눈물은 날지언정 그 눈물은 '그래서 참 좋았다.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그때 가길 참 잘했다. 하길 잘했다'처럼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로 채워지길 바라면서.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베란다를 비웠다.매번 똑같은 나날일 거라고 여겼어요. 나의 인생의 언제든 지금같이 변함이 없이 평생일 거라고 생각하고 살다 갑자기 나만의 타이타닉호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났죠. 침몰해가는 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어요.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내손으로 정리하는 것이었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어요.
당신도 본인만의 타이타닉호를 타고 가다 갑자기 빙산을 만난 적이 있었나요?
그때 당신은 무엇을 남기려고 했나요? 남길 힘도 없었다면 그냥 그때 느낌을 줄줄 써주세요.
기억이 흐려도 좋고 또렷해도 좋아요. 그냥 당신의 그때가 궁금할뿐이에요.
어디다 못할 이야기라도 전해주세요.
당신만의 서랍에요. 서랍이 없다면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으로 보내도 좋아요.
@카르페 디엠/마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