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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자 Mar 06. 2022

피겨 선수하려고?

피겨 성인반 강습

저번 달부터 피겨 강습을 받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겨를 배우고 있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콧방귀를 치며 선수할 거냐고 물어본다. 물론 그런 말을 가볍게 듣고 취미로 배우고 있다고 하며 넘길 수 있는 말이지만 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어릴 때부터 정말 피겨를 배우고 싶었는데 상황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7살 때 처음 아이스링크장에 갔었다. 엘리트 유치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다녔던 덕분에 나는 유치원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반 아이들과 다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반 아이들보다도, 안전을 지도하던 유치원 선생님보다도 아이스 스케이트를 잘 탔었다. 그 나이에는 피겨나 쇼트트랙이라는 종목이 있는지도 몰랐어서 집에 와서 엄마한테 스케이트를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당시 우리 엄마는 집에 잘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로 바쁜 탓에 링크장에 데려다 줄 수도 없어서(아빠의 존재는 기억도 안 나네) 나는 매주 월요일마다 유치원 아이들과 스케이트를 타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집 이사 때문에 중학생 때 전학을 가게 됐는데 전학 간 학교에 CA(Club Activity) 수업이라는 것이 있었다. 난 아이스 스케이트 수업에 들어가 격주 토요일마다 다시 스케이트를 탔다. 피겨 수업이 아닌 그저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는 것뿐이었다. 피겨는 아니지만 그래도 빙상장에 다시 발을 내딛는 순간 너무 설레었다. 우리를 지도해주는 학교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피겨를 따로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성인도 피겨를 배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고 또다시 피겨를 배우겠다고 엄마를 졸랐다. 엄마는 여전히 바빴지만 난 이제 어느 정도 커서 혼자서도 빙상장에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1시간 떨어진 링크장으로 달려갔다. 


가서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학교 친구를 데리고 가서 같이 배우기도 했다. 흰색 피겨 부츠를 신고 링크장에 올랐을 때 링크장을 날아다니는 요정이 된 것만 같았다. 당시 김연아 선수와 안도 미키 선수의 라이벌 구도로 피겨가 꽤 핫할 시기였기 때문에 김연아 선수의 삼성 하우젠 CF를 따라 하며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피겨를 배우고 난 뒤로부터는 오랫동안 맺힌 한이 풀림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우리 학교에서 피겨를 배우는 학생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링크장에도 강습받는 사람이 없고 손님마저 없어서 링크장을 혼자 누비며 연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때는 피겨 때문에 엄마랑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난 피겨를 계속하고 싶은데 엄마가 바라는 특목고를 가게 되면 피겨를 접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중학생이었던 내 인생에서는 피겨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자존감이자 활력소였다. 공부는 누구나 하고 잘하기도 어려운데 피겨는 하는 사람도 적고 어느 정도만 해도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결국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내 피겨 부츠는 창고행이 되었고, 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를 볼 때마다 울적해졌다. 


성인이 되고 나서 피겨 강습을 알아보았지만 어린이 반만 있을 뿐 성인반은 전무했다. 중학생 때 선생님은 성인인데 피겨를 어떻게 배운 거지? 김연아 선수의 약발이 끝났나? 이렇게 피겨를 더 이상 못 배우는 걸까? 지방이라서 그런 걸까? 아이스링크장에 전화해서 피겨 성인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어린이들 사이에서 배우면 안 되냐고 애원해보기도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피겨 부츠는 감히 버릴 수가 없었다. 피겨에 대한 애정이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이상 평생 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몇 년간 아이스링크장의 수강신청 페이지를 기웃거렸다. 


베트남에서 귀국한 뒤 이어진 백수생활로 안 그래도 없던 근육이 다 녹아내리는 지경에 이르러 엄마 따라 라인댄스를 배웠다. 평균 연령이 60대인 곳에서 도무지 재미를 붙일 수 없어서 그만두고 다시 아이스링크 수강신청 페이지를 기웃거리던 찰나 주말 성인 피겨반을 발견했다. 그것도 집 근처 아이스링크장에서!! 망설임 하나 없이 바로 수강 신청했고 집에서 11년 된 부츠를 신어보며 애지중지 닦았다. 너무 오래 방치되어 빛바랜 부츠를 보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나이만 든 부츠에게 미안했다. 


첫 강습을 받는 날, 수강생들을 보고 약간 당황스러웠다. 수강생 중에는 남자, 외국인, 아줌마 등 성별, 국적, 나이가 다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강생이 너무너무 많았다. 주말에 배우는 거라 손님도 많은데 수강생도 많으니 예전만큼 자유롭게 연습할 수 없었다. 그리고 11년 만에 링크장에 오르니 장롱면허를 가지고 운전대를 잡을 것 마냥 긴장되었다. 어릴 땐 수없이 넘어져도 안 아팠는데 이제 엉덩방아만 찧기만 해도 바로 허리 통증으로 이어져 버린다. 예전에 스핀까지 배우기는 했지만 겁이 나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다행히 어렸을 때 해봤던 덕인지 프론트 크로스오버/ 빽 크로스오버, 두 발 스핀까지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쓰리 점프(왈츠 점프)를 배우고 있는데 요즘 막 동계 올림픽이 끝나서인지 수강생이 너무 많아 1~2평 남짓한 공간에서 연습하려니 무리가 있다.


맘 같아서는 당장 쿠션 빵빵한 경량 부츠도 사고 싶고 개인 강습도 받고 싶지만 앙금 푼답시고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배워 나가야지...! 운동을 싫어하는 나에게 애정 하는 스포츠 종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며 매 주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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