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성 연출가 인터뷰> 글 김가희
이 글은 작곡가 채동선을 새롭게 조명한 뮤지컬 <183의 17>의 연출가인 차지성 대표(극단 더늠)를 만나 작곡가 채동선과 뮤지컬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한 글이다.
창작 뮤지컬 <183의 17>은 지난 6월 16일 성북동 한성대입구역 분수마루 광장에서 채동선 탄생 117년을 기념하는 행사 <성북동, 시민과 시인의 노래>에서 초연되었다. 채동선은 1930년대에 성북동에 살면서 성북동 예술가들과 교류한 성북과 인연이 깊은 작곡가이다. 채동선은 특히 정지용의 시 8편에 곡을 붙여 가곡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는데, 정지용 역시 성북동과 인연이 깊은 문인이다.
차지성 대표가 채동선에 관한 뮤지컬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는 올 초에 들었다. 하지만 채동선이 어떤 인물이고 왜 지금 채동선을 다시 불러내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채동선에 대해 알고 싶어졌고, 그래서 차지성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얘기를 듣다보니 차지성 대표를 만나기로 한 게 참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채동선 관련 책은 전혀 없고, 논문 수 역시 12편 정도밖에 안 되어서 채동선의 일대기를 꿰기가 어려웠다 한다. 어렵게 퍼즐 맞추듯이 엮어 나간 채동선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알맹이만 쏙쏙 빼내 먹은 느낌이 들어 차지성 대표에게 감사할 뿐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온 정보를 요약하자면, 채동선은 전남 보성 출생으로 1901년에 태어나서 1953년에 사망한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후 1929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가르쳤다. 해방 후에 여러 음악 단체의 협회장 등을 역임하고 독창곡, 교성곡, 바이올린 독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민요 채보를 하였다. 가곡집이 있으며 대표적인 가곡으로는 <추억> <동배꽃> <그리워> 등이 있다.
채동선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백과사전의 정보는 거의 무용지물인 것 같다. 차지성 대표는 가곡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가곡이 원래 있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여 <고향>이라는 가곡이 나오게 된다. 교과서에 실린 곡으로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곡이다. 그런데 정지용이 한국전쟁 이후 소식이 끊기고 북으로 간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채동선의 곡은 <망향>(박화목 시)과 <그리워>(이은상 시)로 가사가 두 번 바뀌어 한 곡에 세 개의 가사를 가지는 운명을 겪는다. 채동선이 만든 곡의 변천사를 들으면서 분단된 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곡의 운명을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곡에 더 정이 간다. 분단과 전쟁으로 바뀐 것이 어디 채동선의 곡 뿐이겠는가? 어쨌든 1988년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면서 가곡 <고향>도 다시 이름을 되찾는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사적으로 친분 관계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차지성 대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채동선과 정지용의 아내들이 동창이었고, 어느 논문 주석 한 군데에서는 채동선 아들이 전학을 가게 된 사실이 정지용과 관계가 있다는 언급도 있다.
채동선은 고등학교 때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의 길에 들어섰지만, 부모의 반대로 일본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결국 미국을 거쳐 독일에 가서 클래식 음악 공부를 한다. 이 과정에서 채동선에게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3.1운동이다. 채동선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이 때 보성의 대지주이자 금융업으로 어마어마하게 부자였던 채동선의 아버지가 손을 써서 함께 했던 동지들을 남겨둔 채 그만 홀로 감옥을 나오게 된다. 감옥을 나오게 된 자세한 상황이나 채동선의 심정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이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중요한 일이었다는 사실 만큼은 유추가 가능하다.
홍난파의 찬사를 받으며 바이올리니스트로 화려하게 귀국한 채동선은 일제 강점기 하 조선에서 공연과 작곡을 하며 음악가로 명성을 쌓는다. 차지성 대표는 채동선을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채동선은 클래식 음악 이외에 우리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하는 일을 하였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시절,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시절에 음악인으로서 명성이 있던 채동선 역시 창씨개명과 일제를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 때 채동선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다. 일제의 압박에 그는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수유리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 그는 화훼농사도 지었는데, 그가 재배한 꽃이 너무 예뻐서 고가에 팔려나갔다고 한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민요 채보를 했다. 아버지 재산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저항을 했다는 점은 존경스럽다.
뮤지컬 제목이 왜 <183의 17>인지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에서부터 모든 소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자기가 사는 집 주소마저 일본식 표기로 바꿨어야하던 시기에 채동선은 숫자와 ‘의’라는 한글을 그대로 붙여두는데. 여기서 차지성 대표는 채동선의 저항 정신을 읽어낸다. 차지성 대표는 이것을 소극적 저항이라 한다. 나아가 차지성 대표는 이러한 소극적 저항의 모습을 한 채동선으로부터 오늘날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선 평범한 시민들의 작은 실천들을 보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거나 거창한 철학을 내세우지 못하지만 소극적이나마,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서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차지성 대표는 평범성 또는 소극적 저항에 대한 이야기로 채동선의 삶과 오늘날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연결시켜낸다.
차지성 대표의 극단 더늠은 역사극을 주로 한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 중종을 다룬 <왕을 바라다>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로 풀어본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다루는 창작극이 주는 팩트의 힘, 역사의 힘을 차지성 대표는 알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차지성 대표는 항상 고민한다. 그 인물을 영웅화시켜서도 안 되고, 비하시켜서도 안 되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이번 <183의 17>을 만들면서도 그 점이 어려웠다. 오랜 고통의 시간 끝에 나온 채동선은 그래서 나와 우리와 닮아 있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채동선은 6.25전쟁 때 피난 간 부산에서 복막염으로 죽었다. 복막염은 미리 수술만 받았어도 죽을병은 아니다. 피난 시절 채동선은 굶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해방 이후 여러 음악단체의 협회장 등을 맡고 있어서 피난을 갈 수 있는 기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차표를 제자에게 양보하고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피난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을지 상상만 해도 안타깝다. 이 이야기 또한 차지성 대표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제자에게 기차표를 주는 장면은 그가 동지들을 뒤로 하고 홀로 감옥에서 나오는 장면과 겹쳐진다. 인간이란 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고귀하고 숭고한 결정을 하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
안타깝게도 뮤지컬을 못 본 채 글을 정리한 것이 아쉽다. 뮤지컬이 보고 싶어진다. 이런 이야기에 음악이 어떻게 더해졌을까? 채동선이 궁금하고, 차지성이 궁금하고 뮤지컬을 만든 모든 사람들이 궁금하다. 궁금한 게 있다는 게 나에겐 삶의 또 하나의 기쁨으로,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글을 끝내며 즐거운 시간 함께 해 준 차지성 대표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