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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Dec 30. 2022

아무리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에 무척 가난했다. "세상에서 절대 숨길 수 없는 세 가지는 가난, 재채기, 사랑" 뭐 이따위 낭만적 문구가 유행하던 사춘기 시절에도 숨길 수 없는 사랑에 설레는 쪽이 아니라 숨길 수 없는 가난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을 느끼는 쪽이었다. 가난해서 부끄러웠던 일들이 하도 많아서 그걸 떠올릴 때마다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실제로 가난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예전엔 다들 그랬지, 다들 그렇게 못 살았지...라고 하기에 내가 자란 8,90년대는 중산층이 대량생산되던 시대였다. 주공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는 방 두 칸짜리 반지하에 연탄아궁이가 있는 걸 보고, 불쌍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아직도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놀랐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아빠를 졸랐던 자기가 부끄럽다고 했다. 그렇지, 그 친구가 느낀 것이 '부끄러움'이고 내가 느낀 것은 '수치'였다. 이후로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하여 내 단칸방을 가지기 전까지 집에 친구를 데려오지 않았다. 같은 단칸방이라도 혼자 사는 단칸방은 훨씬 나았다.


나이가 서른이나 넘어서 국민학교 졸업장을 열어보고 통곡한 적도 있다. 그땐 다들 그랬지…라는 생각이 기억조작이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만 꾀죄죄하고 다들 멀끔했다. 그때 인기가 많았던 아이들, 공부도 잘하고 인성도 좋았던 아이들은 지금 봐도 하나도 촌스럽지가 않았다. 아마 1930년의 졸업앨범을 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잘 살던 사람의 어린 시절 사진에는 윤기가 흐른다. 하여간 나는 가난했고, 보잘것없었고, 그런데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학원 보내달란 말을 꺼낼 엄두를 못 냈기 때문에 일부러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콘셉트로 삼았다. 모부는 사는 게 바빠 숙제나 준비물을 못 챙겨줬고, 나는 항상 숙제를 안 해서 혼나는 아이였다. 아이가 혹시나 공부를 잘하면 뒷바라지를 해야 할까 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게 내 모부의 형편이었다.


누가 IMF로 집안 망해서 힘들었단 말을 하면, 나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전에도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든 안 망하든 우리 가족에겐 별 차이가 없게 느껴졌다. 오히려 IMF 기간에는 등록금 동결의 혜택을 받았고,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대학 시절을 카드빚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카드대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경기회복을 위해 카드대란을 일으켰던 정부가 부랴부랴 신용회복제도를 도입하면서 그 덕에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나는 가장 빨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학원 강사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대학 졸업 당시에 내가 쓴 학자금과 생활비,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빌린 돈을 더해 4천만 원의 빚이 있었는데 이걸 모두 갚는 데 5년쯤 걸렸던 것 같다. 4천만 원은 지금도 큰돈이지만 2000년대 초반이었던 그때는 스물다섯 살이 감당하기에 훨씬 더 큰돈이었다. 개인회생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5일, 15일, 25일, 30일마다 이자 내는 날이 돌아왔고, 매일 빚독촉을 받았다. 원장을 찾아가 가불해 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했고 그때마다 부끄러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일하면서도 늘 이력서를 썼고, 면접을 봤는데 월급을 10만 원만 더 준다고 하면 근무조건이 어떻든 학원을 옮겼다. 경력을 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고, 그 돈을 벌려고 강의 능력을 키웠다. 다행히 적성에 맞는 일이었고, 큰 학원에서 일하면서 친구들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스물아홉에 빚이 0원이 되는 순간이 왔고, 그때 나는 일을 잠시 그만두고 쉬었다. 내 20대를 요약하면 빚, 술, 남자라고 친구와 웃었던 기억이 있다.


IMF로 집안이 망했다는 사람이 부러웠다. 아니, 어느 한순간이라도 좋은 집 살아보고, 좋은 차 타 보고, 모부 사랑 듬뿍 받아본 사람이 있다면 다 부러웠다. 하이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중산층 사춘기 청소년들의 방황도 부러웠다. 엄마가 용돈을 많이 주고 일만 하러 다녀서 엄마밥이 그립다고? 엄마가 매일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용돈도 못 주고 엄마밥도 못 차려주는 애가 듣기에 그건 너무 사치스러웠다. 그래도 난 엄마가 있지.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보기에 그런 드라마는 폭력에 가깝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사실 삶을 더 모를 때는 엄마가 없어도 부자인 친구가 부러웠다. 나중에는 누구네 집이 할머니 할아버지 때는 부자였다는 말만 들어도 부러웠다. 애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같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할아버지도 머슴이었겠지라고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우리 애비는 종이었다는 시를 쓸 엄두는 못 냈다. 가난을 이야기하고, 그 상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또한 대단해 보였다. 가난하면 움츠러들게 마련이고 비밀이 많게 마련인데, 그걸로 시를 쓸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지.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그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죄다 가난한 사람들이겠지.


어릴 때 엄마는 별의별 일을 다 했는데 어느 날은 목재소에서 낫으로 나무껍질 벗기는 일을 하다가 검지 손가락 끝 부분이 조금 잘렸다.(인천에 목재소가 많다) 나는 엄마가 없는 곳에서 무릎에 식칼이 박히거나 머리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고, 그때마다 이웃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았다. 엄마는 노점상을 해서 나와 동생의 학비를 댔고, 벌어도 벌어도 두 아이를 키우기에는 모자랐다. 나는 대학생 때 학비가 없어 휴학을 하고 정수기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프레스기에 검지 손가락이 눌렸다. 엄마가 다친 손가락과 같은 손가락이었다. 토요일이었는데 부장은 바쁜 차에 일손이 줄어들 것만 걱정했고, 나는 수당도 없는 잔업을 빠지게 된 것만 그저 송구해서 병원도 안 갔다. 약국에 가서 빨간약으로 소독하고 주말 내내 그 고통을 그저 참았다. 산재는커녕 약값도 내가 내고, 월요일에 손가락에 붕대 감고 출근해서 검지 손가락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나와 엄마의 검지에는 아직도 그때 흔적이 남아 있다.


"시대가 뭐길래 꿈을 빼앗기도 하는"(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런 시절이었기에 대학 때 친구들은 술을 많이 마셨고, 취하면 가난을 이야기했다. 나는 술자리에서 가난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가난을 들키기 싫어서가 아니라 시시해서였다. (주로 남자들이) 대단한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가난 얘기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니들이 가난을 알어? 그런 마음으로 잠자코 술이나 퍼부었다.


우리 집이 조금이라도 살만하게 된 것은 내가 성인이 되면서였고, 나는 K-맏딸답게 한동안 온 가족을 먹여 살렸다. 내가 학원 강사로 일해서 번 월급 180만 원, 혹은 300만 원이 우리 온 가족의 수입원이었던 적도 있고, 내가 독립한 원룸 방으로 모부가 이불보따리만 들고 밀고 들어온 적도 있다. 엄마는 나를 학원도 못 보내주고 제대로 못 가르친 걸 미안해 하지만,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해서 엄마의 고생에 보답했다. 짜증스럽고 증오스러웠던 일이 왜 없을까. 20대 때는 빚과 술과 남자를 핑계로 집에 안 들어간 적이 많았다.


인천 곳곳에 안 살아본 동네가 없을 정도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이사를 갈 때마다 집은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해서, 늘 버리는 것이 익숙했다. 어느 동네를 가도 가난했던 기억뿐이다. 지금은 청라국제도시가 된 가정동과 신현동에도, 제물포와 동인천에도, 구월동과 모래내시장에도, 부평과 부개동에도, 연수동에도... 슬프고 부끄럽고 창피한 기억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은 바다를 메워 만든 송도신도시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니까 할 말 다 했지.


왜 난 갑자기 가난 얘길 하고 싶어졌을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종종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 쓰는 것은 처음이다. 가난했던 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 자랑이 아니라 굳이 널리 알릴 필요 없는 일이지만, 수치감 때문에 내 본모습을 일부러 숨기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이다. 너무 가난했고, 너무 볼품없는 모부를 가졌고, 너무 못 배웠고, 그래서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 몇몇 선생님들이 생각나서 나도 용기를 내 보았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가난한 어린 시절 이야기가 페미니즘과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내가 자란 과정은 내가 래디컬이 된 과정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아주 상관이 없지는 않다. 엘리트 지식인들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면 참고 들어 넘기지 못하는 성미도 내가 자란 배경과 관련 있고, 웬만한 공격에는 꿈쩍도 안 하며 좀처럼 밟히지 않는 생존력도 가난과 관련 있다. 나는 좀처럼 불안에 잘 빠지지 않는 성격이기도 한데, 어디론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에는 내가 온 곳이 이미 반지하였다. 삶을 돌아보면 언제나 어제보다 오늘이 나았다. 평범하게 자란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운이 좋다고 하기 어렵지만 나와 같은 환경에 있던 사람들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뭐, 페미니즘과 상관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랴. 이게 진짜 내 인생이다.


2022. 4. 19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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