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악마야, 징그럽고 소름 끼쳐!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호의를 베풀면 베풀수록 덫에 걸린다. 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열 명쯤 건졌고, 그중 여덟은 보따리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하나를 주면 세 개를 바라니, 아예 다섯 개쯤 주어버리면 왜 열 개가 아니라 다섯 개냐고 화를 내는 경우도 봤다. 달라는 대로 주다 보면 받은 쪽에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느 순간 버럭 화를 내며 뒤돌아 간 적도 여러 번이다. 이런 일도 한두 번이어야 뻔뻔한 치들이라고 욕을 하는 거지, 열 번 정도 되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왜 남이 힘들다고 하는 걸 지나치지 못하고, 뭐라도 해주지 못해 안달인 걸까?
행동에 책임지는 데 익숙하고, 자책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몇 번의 배신이랄까, 기대를 저버리는 결과를 보고도 대부분은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고, 반성을 하고 끝내곤 했다. 어떤 경우라도 상대를 탓하는 게 나에겐 너무 힘들다. 자책하는 게 가장 쉽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느라 나도 젖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몸이 젖은 걸 갖고 짜증내거나 불평을 하면 내 마른 옷을 먼저 입혀주고 먹을 걸 챙겨주고 난로를 갖다 피워주느라 나는 감기에 걸려버린다. 그렇게 하는 게 내 마음이 편하다. 이런 건 호의가 아니라 호구라고 한다.
그런데 한 편으로 보면 내가 은근히 상대를 코너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상대가 짜증을 낸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가 되니까. 나는 나를 한없이 낮춤으로써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그렇게까지 희생하고 배려하고 양보했는데도 상대가 고마운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고 나는 희생자나 피해자가 된다. 그게 내가 관계에서 정당성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나와 동생의 오래된 갈등도 본질은 사실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없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언니에게서 분명히 도움과 이익을 얻고는 있지만 이런 관계가 지속될수록 본인은 점차 이기주의자에 심하면 가해자가 되고, 언니는 희생자나 피해자가 되니까. 동생은 그게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끔 화가 많이 날 때, 동생은 나에게 저주를 퍼붓곤 했다. "너는 니가 착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넌 악마야. 진짜 징그럽고 소름 끼쳐!" 이렇게 말할 때도 있었다. 그때 나는 동생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참고 인내하고 착하게 행동했는데도 이런 저주를 왜 들어야 하나, 동생이야말로 악마 같았다.
이런 싸움 후에 누가 더 자책했을까? 아마 동생이었을 것이다. 나는 저주를 듣고 숨 쉴 수 없이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피해자 입장이었기에 대체로 두 발 뻗고 잤다. 동생은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울면서 반성의 편지를 썼다. 자기가 언니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모를 것이다, 화가 나서 뱉은 저주는 진심이 아니었으며 자기는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썼다. 처음엔 이런 편지를 받으면 나도 화를 풀고 울면서 화해를 하곤 했다. 그러나 다혈질의 동생은 활화산 같아서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주기적으로 폭발했는데, 그때마다 더 강력하고 날카로운 말로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화가 났을 때 동생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편인 데다,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리기 위한 일격의 표현을 섬세하게 골라서 가장 아픈 곳에 꽂았다.
나는 매번 너무나 크게 상처받았고, 동생은 매번 후회와 반성을 담아 눈물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그 편지를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몇 번의 전투를 겪고 20대 중반쯤 되었을 때 동생을 향한 나의 마음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하고 거칠어서 바늘하나 꽂을 공간도 남지 않았다. 동생이 악을 쓰고 비수를 꽂으려고 별 짓을 다 해도 꿈쩍하지 않게 되었다. 동생 한정으로, 감정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상처를 이겨내는 나만의 방식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동생도 나만큼이나 괴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동생을 한동안 멀리했다. 가까이하면 내가 상처받기 때문에. 그러나 그만큼 동생도 나를 멀리했을 것이다. 가까이하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지금은 미움도 애정도 증오도 사랑도 별로 없이 그냥 공기처럼 존재하는 호적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로, 모든 어른들이 그러듯이,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다. 우리를 똑같이 닮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기도 했고, 기질이나 천성, 유전과 환경에 대한 지식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런저런 심리와 방어기제를 잘 알아서 이해하게 되기도 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도 피해자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언니, 인격적으로 훌륭해서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는 언니였으니,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못된 아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자신이었다. 똑같은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면서 나는 선의 위치를 동생은 악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관계였다. 나는 회개할 것이 적었지만, 동생은 천성과 기질 때문에 회개할 일이 많았다. 나는 일찌감치 신을 버렸으나 동생은 아직도 기도하며 자기 성질을 죽이려 애쓰고 있다.
내 문제가 뭐냐면, 동생을 이렇게 희생시켜 놓고도 나만이 절대적인 피해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집 밖에서 만나는 관계에서도 나는 희생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고집했다. 자책을 많이 한다. 상대가 화가 난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닌데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건졌든 안 건졌든 그는 물에 빠졌으니 옷이 젖었고, 찜찜하니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 나에게 화내는 게 아니라 옷이 젖어 짜증을 내는 것이다. 꼭 내 마른 옷을 주고, 내 먹을 걸 주고, 내 잠자리를 양보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문제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서서 어린 동생 돌보듯이 내가 물에서 건져낸 사람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누군가 툴툴거리면, 그게 그렇게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사회생활을 잘하는 편이고, 사람들 사이에 평판이 나쁘지도 않으며, 리더로서도 여러 활동을 잘 수행해내고 있다. 대체로 나쁘지 않게 살고 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는 가끔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도 한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무엇보다도 '착함'이란 타인의 평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어서, 내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병이 난다는 것이 문제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착한 역할을 고집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내 상태를 어느 정도 병적이라고 생각하고 탐구하는 중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