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술을 꽤나 좋아하지만 매 끼 소맥은 좀...
터키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카파도키아의 풍선을 제외한다면 안내서의 설명에 따라 루트를 짜며 가장 기대했던 장소가 에페소였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중학교를 미션스쿨로 배정받아 다니는 바람에 한참 주말에 교회를 다녔었는데, 이스라엘 역사서라 생각하고 한 번 읽어봐야지 하고 접했던 성경에서 '에베소'라는 이름으로 나오던 도시가 여기였더라. 고대, 특히 1~2세기에는 인구가 25만에 달했을 정도로 아주 번창했던 대도시였다는데(그랬기에 사도 바울의 선교 거점이 되어 신약 성경에 들어갔나보다) 강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그것도 한참 옛날의 일이테고, 지금에서는 아예 도시 자체가 사라져 폐허만 남아 현대인들에게 과거의 모습을 엿볼 기회를 주고 있다. 냉정히 말한다면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외딴 폐허겠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지.
유럽의 유명한 도시를 가 보면 구시가로 넘어가면서 마치 내가 속한 시간이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는데(특히 피렌체와 체스키 크룸루프에서 정말 크게 느꼈던!), 아예 사라진 도시의 커다란 흔적 그 안으로 들어가는거니까, 인디아나 존스같은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절로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내게는 여행 전체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폼페이에 가면 당시의 모습이 너무 잘 보존, 복구되어 있어 이런 기분이 대단하다던데 참 궁금하다.
셀축에서 에페소가 차로 5~10분, 셀축에서 쿠샤다스가 차로 20~30분이라고들 한다. 화들짝 놀라 지도를 확인 해 보니 '미쳤나? 유적지 다 보고 나와서 피곤했을텐데 그 상황에 대체 왜 갔을까?' 싶은 거리인데 '시간이 남아 아까우니' 갔다는데, 이거 아마 아니 분명 내 생각이었을거다. 내가 아쉬워하며 의견을 냈을테고 부모님이야 뭐 아들이 하자는데, 그러자고 하셨겠지. 배고프고 춥고 힘든 와중에 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최대한 봐야지' 하는 마음을 못 누르고 부모님을 끌고 갔다왔다니, 당시의 나 참 대단하다. 지금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절대 원칙으로 삼는게 '하루에 일정은 딱 하나만' 인데, 참...
이제 와서야 많은게 보인다. 터키 여행이 이 깨달음의 시작이었을까? 아니. 전혀 못 느끼고 지나가고 그냥 살아왔기에 신혼여행이나 이후 다녔던 유럽여행 또한 매우매우 빡빡한 일정으로 일관해서 와이프가 현지에서 앓아눕게 만들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시작되고 나서야, 계획을 변경하고 예약을 날리고 아이를 들쳐안고 병원을 달려가고 하며 몇 차례나 엄청난 고생을 하고 나서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대장이고 내가 준비하느라 고생했으니까 내 마음대로 할거야'가 아니라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일은 이거니까'의 마음으로 전체 구성원의 최저치를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야 한다는걸. 역시 내 위치가 바뀌는 경험을 겪어야, 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뭐, 나도 나름 힘든게 있었다. 첫 번째는 놀랍게도 술이었다. 술을 꽤나 좋아하기에 아예 싫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매일 점심 저녁을' 소맥과 함께하는건 슬슬 힘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즐거움이야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즐기기만 할 수 있는게 아니었던게, 만약 친구들과 온 여행이라면 힘들 부분이 아니었겠지만, 어쩌면 아주 하루 종일 경쟁하듯이 더 많이 퍼 마셨겠지만, 모든 일정에 대해 이동과 관람과 설명과 먹고 마시고 쉬고 자는 모든 것을 다 책임지고 가이드 노릇을 하며 다니는데 술을 항상, 그것도 직장 상사 이상으로 불편한 기분으로 매 끼 마시는건 좀... 휴. 가방에서 소주가 나올 때 마다 '아... 또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다 절로 엄마와 눈빛이 마주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것도 이제와서 보니 추억이다. 아이를 셋이나 데리고 다니는 지금, 언제 어디서 또 그렇게 술을 달고 살아보겠나. ㅋㅋㅋㅋㅋ
또 한가지는, 하루 종일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짜증을 받아내며 다니자니,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뭘 해도 빨리, 한 번에,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이고 좋은 방법으로, 실수 없이 해야만 안 터지니까, 뭐랄까 당장 순간이 괜찮아도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니 항상 폭탄과 함께 있는 기분. 사실 평생을 내가 힘들어하고 싫어했던 그런 부분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건, 이렇게 기억을 떠올리며 문장으로 정리 해 쓰다보니 웬걸 딱 지금의 내 모습이다. 아이들에게 신나게 즐겁게 잘 해 주다가도 무엇 하나 아주 작은거라도 내 맘에 안 드는 상황이나 사건이 발생하면 그대로 바로 감정을 마구 터뜨려 날카로운 말을 뱉어버리는 오락가락하고 인내심 없는 아빠의 모습. 아이들 정서에 매우 안 좋을거라는 것을 들어서가 아니라 내 체험으로 알고 있는 잘못이네. 경계하고 조심하고 반드시 고쳐나가야겠다. 뒤늦게 글을 정리하며 이런 깨달음을 얻어간다. 반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