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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더 덕 Sep 09. 2020

산 속에서 희곡쓰기

이탈리아 소도시 인턴십 이야기

얼마전엔 파이가 왔다.


파이는 피렌체에서 인턴십 중인 친구로 나보다 3살이 어리다. 같이 학교에서 인턴십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된사이지만 타지에서 느끼는 동지애 때문인지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도 가까이 지냈다. 구김없는 그녀의 성격 덕이다. 원래는 피렌체 축제 기획팀에서 근무했지만 축제도 끝났고 잠깐이라도 떠나있고 싶다며 내가 있는 곳으로 오면 안 되겠냐고 회사에 문의해 열흘정도 나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전보다 조금 들떠있다. 말수도 늘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여름마다 예술가들을 위한 워크샵을 진행한다. 참가자들은 주로 뉴욕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다. 파이와 나는 워크샵에 참가하면서 잡일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이번 워크샵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극작가 M과 함께하는 극작 워크샵이다. M은 중년의 여자분으로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눈매나 생김새말고 눈동자, 눈빛이. 워크샵 첫 날 그녀는 워크샵의 규칙을 설명했다.


"아침부터 점심식사 전까지 오전시간 동안은 나와함께 내가 주는 키워드들로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개인적으로 작업하도록 해요. 나와 함께할 때는 노트북, 핸드폰, 패드 등의 전자기기는 사용할 수 없어요. 타자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한 작가들도 있다는 건 알지만 나와 할 때는 펜과 종이를 쓰도록 해요."


워크샵이 열리는 곳은 산 속에 위치한 오래된 호텔로 근처 주민들이 여름 휴가로 가볍게 들르는 곳이다. 차를 타고 산을 올라 호텔에 다다르면 사방에는 푸른색 나무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통유리 너머로 나무들이 보이는 호텔 로비에 둘러앉아 3시간이 넘게 아무말 없이 글만 쓴다. 말하는 건 M 뿐이다. M이 주는 키워드는 매일 다른데 오늘은 공간이었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 M은 눈을 감고 공간을 상상해 내라고 이야기했다. 실제 기억 속에서 찾아도 좋고, 상상 속 공간도 좋다고. 처음에는 선을 떠올리고, 바닥, 벽을 그렸다. 무슨 색인지, 누가 있는지. 여행 가이드를 따라가듯 M이 하는 말을 따라 공간을 그렸다.


나는 왜인지 어린 시절 얹혀 살던 고모집 작은 방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기억을 토대로 그 방과 닮은 새로운 방을 그렸다. 하얀 방에 창문 하나. 옷장. 문옆에 선반 위에 숨겨둔 분홍색 상자 하나.


분홍색 상자.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흠칫하고 놀랐다. 분홍색 상자. 엄마가 집을 나가고 고모집에 얹혀 살던 어린 시절. 언젠가 분홍색 상자가 집에 배달된 적이 있었다.


상자 안에는 예쁜 새 학용품들이 들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보낸 것이리라. 고모는 누가 보냈는지 말하지 않고 상자를 선반 위 내 손이 닿지않는 곳에 박아두었다. 착한 일을 하면 하나씩 꺼내주겠다고.


하지만 상자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열 살 짜리 손으로 매일 집안을 쓸고 닦아도, 아침마다 일어나 밥상을 차려도, 밤새 고모 다리를 주물러도. 착한 일이란 건 그저 고모의 마음이 내킬 때란 뜻이다. 그리고 고모는 한 번도 나에게 뭔가를 주는 것에 마음 내켜하지 않았다.


새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며 눈이 떠졌다.


"공간을 다 그렸으면 그 곳에서 일어날 법한 장면을 써 보세요. 등장 인물은 셋 이하로."


점심식사 후 한 손에 카푸치노를 들고 호텔을 나와 테라스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성인들은 들판에서 일광욕을 하고 아이들은 원반던지기 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햇빛 알러지 때문에 일광욕은 못하지만 그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숲냄새를 맡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초록색 풍경을 바라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 다른 삶의 엄마. 나는 나와 동갑인 엄마와 작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써내려갔다.


집에 가는 길에 파이와 젤라또를 먹고 티그레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오늘은 토마토 소스와 고춧가루를 넣은 생선조림을 만들 생각이다. 무는 없으니 감자를 넣어야겠다.


M이 준 키워드 카드
롤링페이퍼 쓰는 중 앉아서 기다리는 귀여운 파이


호텔 앞 테라스에서 아침마다 먹던 카푸치노와 코르네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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