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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모이 Jan 03. 2024

통역사의 비밀 병기, 노트테이킹

길 위의 이정표

말과 글은 공감을 얻기 위한 행위이고 공감을 얻으려면 주장과 설득을 해야 한다. 주장과 설득을 위해서는 논증이 필수적이다. 통역 행위는 따라서 연사의 말속에 숨은 논증을 이해, 파악하는 게 핵심이다. 사실 이 논증만 잘 파악했다면 통역의 절반은 완성이다.  


그런데 연사의 말은 짧게는 1분 길게는 수 분에 걸쳐 이어진다. 한 번 본 것을 사진 찍듯이 기억하는 기억력(photographic memory)이 있다면 몰라도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할 수 없다.


따라서 통역사는 들으면서 노트로 들은 내용을 남겨야 한다. 들으면서 논증을 구조화하여 적고 연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트 첫 부분으로 돌아가 자신의 노트를 기반으로 연사의 메시지를 논증의 흐름에 맞춰 도착어로 전달한다.


다행히 통역사에게는 ‘노트테이킹(note-taking)’이라는 비밀 병기가 있다. 메시지를 기호 형태로 받아 적는 기술이다. 이해한 내용을 나중에 다시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노트에 적어두는 노트테이킹은 길 위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노트 시 기호를 사용하면 기억을 직관적으로 빠르게 상기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통역사는 모두 각자 고유한 모양이나 표기법을 가지고 노트테이킹을 하지만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기호도 있다.


먼저 한자다. 기초 한자를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그림 그리듯 빨리 쓸 수 있고 모양을 보고 직관적으로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큰 기호 도구다.
말모이 기호 리스트 1
또 화살표와 같은 특수문자도 상태와 방향성을 나타내는데 많이 쓰인다.
말모이 기호 리스트 2


감정을 나타내는 동사는 얼굴 표정 이모티콘으로 간단하게 표기할 수 있다.
말모이 기호 리스트 3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의도와 메시지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안 된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기호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적기만 한 기호는 머릿속에서 제대로 된 의미를 ‘출력’ 하지 못한다. 이해가 안 될 때는 잠시 노트를 멈추고 가만히 들어 봐야 한다. 이해가 안 되거나 안 들릴 때야 말로 지금 하는 말의 의도, 말 자체 보다 그 말을 하는 이유, 해당 메시지의 전체 발언에서의 역할(주장, 근거, 이유, 예시, 인용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한 텍스트는 기호나 숫자 한 두 개만으로도 전체 문장을 ‘출력’해 낼 수 있다.


이해가 됐다는 전제 하에 원문의 의도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충실한 통역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노트테이킹의 구조화다. 구조화가 잘 된 노트는 연사의 메시지를 분석적으로 잘 파악했다는 뜻이고 이는 연사의 의도와 메시지를 도착어로 전달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기에 통역사에게 중요하다.


몇 가지 도움이 될 노트테이킹 유의사항을 정리해 본다.

 

주어와 동사 위치


한국어와 영어는 동사의 위치가 다르다. 영어는 주어 바로 뒤에 오지만 한국어에서는 문장 맨 마지막에 온다. 따라서 영한(영어-> 한국어) 통역이냐 한영(한국어 -> 영어) 통역이냐에 따라 동사 위치와 이 기호가 동사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표시해 두면 알아보기 편하다.


동사의 시제

동사의 위치와 함께 중요한 것은 동사의 시제다. 특히 영어는 시제가 현재형, 진행형, 현재완료형, 과거형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나만의 시제 표시법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조동사 강조

조동사는 본동사를 보조하는 기능이지만 연사의 의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제대로 표기해서 살려야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당위성이나 의무, 충고를 나타내는 ‘should’와 추측과 의무를 나타나는 ‘must’가 대표적이다.

“The government should step up its work to build a national, high-quality teacher workforce.”
“China's GDP growth should turn around by the second quarter of 2023, says the IMF.”

첫 번째 예시는 높은 수준의 교사 인력을 국가적으로 양성하려면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조언과 당위성을, 두 번째 예는 중국 GDP가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IMF의 전망을 말해준다. Should를 빼고 본동사만 놓고 보면 각각 ‘조언’과 ‘전망’의 핵심 의도가 빠지게 된다.


강조 부사의 중요성

​조동사 못지않게 연사의 의도와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해주는 게 부사다. 특히 강조하는 부사가 그것인데, just(단지), only(오로지, 오직), even(심지어), well/way(훨씬)와 같은 것들이다. 노트를 하다 보면 자칫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연사의 의도가 살지 않는 통역이 된다.


연결어 강조

논증을 펼치는 데 있어 유효한 장치가 연결어다. 대조/비교, 첨언, 순서, 인과, 이유 등의 방향 전환을 나타내는 방향지시등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대조나 비교는 vs, 첨언이나 추가적인 정보는 +, 순서는 숫자로 1,2,3 등, 인과와 이유는 각각 수식 기호인 , 를 쓴다.


대각선, 세로 방향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달리 통역 노트는 대각선과 세로 방향으로 필기한다. 주로 기호를 많이 쓰기도 하거니와 통역사의 노트는 촘촘하게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 분에 걸친 연사의 말이 끝나고 노트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와 바로 발화를 시작해야 하는 통역 특성상 한눈에 알아보기 쉬워야 하는 이유도 있다. 또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구분을 짓는 것도 중요하다. 문장이 어디서 끝나는지 명확하지 않은 노트는 통역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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