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아마추어로 즐기면서 할 때가 가장 좋은거야'

내 인생을 바꾼 그의 한마디

10대 시절 저는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소년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프로게이머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후 학교 공부는 완전히 뒷전으로 하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게임만 했었죠. 게임을 할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었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저에게 잔소리하는 대신 응원을 해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학교 야간 자율 학습을 당당하게 빠지고 게임을 하러 가니, 친구들의 부러움을 늘 한 몸에 받았지요.


당시 저는 울산에 살았는데,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 때 온게임넷과 MBC게임 두 방송사에서 개최한 대회에 각각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회에서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본선에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온게임넷 대회의 경우 전국에서 12명을 뽑았는데 그중에 들었으니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당시 남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프로게이머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샐럽이 되는(?)것 이기에, 뭔가 독특한 친구라는 인식으로 주목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대망의 본선 대회 날, 부모님은 저를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셨습니다. 용돈까지 쥐어 주시며

"아들 잘하고 와! 파이팅!"

응원의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서울로 가는 내내 드디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대회에서 모두 보기 좋게 탈락했습니다.

프로게이머에게 2:0 패배

꼭 본선에 진출해서 TV에서 내가 게임하는 모습을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아버지 차를 바꿔드리겠다고 호언장담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내 실력과 운, 환경을 탓하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


'학교는 시간 낭비야.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게임에 매진하자.'


자퇴 얘기를 꺼냈을 때 부모님께서는 적지 않게 당황하셨을 테지만,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시며

'그래도 한 달만 생각해보자.' 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제 앞에 주어진 '한 달'이라는 선택의 시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중요한 결정의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고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같은 클랜의 프로게이머 형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자퇴하고 게임 연습하는 시간을 늘려서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요"

"게임은 아마추어로 즐기면서 할 때가 가장 좋은거야"


프로게이머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당시 제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결과적으로 지금 제 인생의 길을 바꿔놓았습니다.


'게임은 아마추어로 즐기면 할 때가 가장 좋은거야. 프로가 되면 게임을 연습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대회에서 지면 돈도 못 벌어. 만약 지금 네가 하는 게임의 인기가 떨어지면 네가 투자하고 노력해왔던 시간이 무의미하게 되는 거야.'


그 형은, 당시 삼성칸 게임단 소속 프로게이머였습니다. 숙소에서 매일 먹고 자며 게임만 하는 형의 생활을 동경해왔던 저에겐 당시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마냥 행복하고 즐겁게 게임만 하면서 돈을 벌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죠.


그 프로게이머 형이 현실을 이야기해주었기에, 프로게이머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가득했던 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과의 이 대화를 계기로 부모님과 진지하게 꿈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고, 마침내 프로게이머의 꿈은 포기하되, 게임은 즐길 정도로만 하기로 하고 다른 길을 모색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세상에 재미있고 즐거운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게이머'가 인생의 최종 목표이자 전부인 줄 알고 있던 저는 넘치는 열정으로 '고등학교 자퇴'라는 다소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 했지요. 만약 그때 그랬더라면 저는, 제게 숨겨진 다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오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형의 말처럼 '아마추어로서 하는 게임의 즐거움'은 잊은 채 오히려 게임을 싫어하게 되는 날이 왔을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경험에 도전하고 즐기며 사는 지금의 저로서는, 참 고맙고 다행인 그 형의 한마디였습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안 되었지만, 항상 형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특별한 기회를 통해 무려 15년 만에 직접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삼성 칸 소속 워크래프트3 프로게이머였던 '원성남(Kenshin.WeRRa, 그 한마디의 주인공)' 및 철없던 17살의 저를 데리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아주 잠깐이었지만, 프로게이머의 일상을 경험하게 해 주었던

'유승연(Justice.WeRRa), 임효진(Anyppi.WeRRa), 김성연(Lof.myth)' 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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