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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홍대리 Sep 15. 2021

내 아이에게 인생의
멘토가 될 스승이 있습니까?

코칭맘, You can do it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는 ‘속수지례束脩之禮’를 표하는 이에게도 흔쾌히 가르침을 내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속束’은 다발로 열 개를, ‘수脩’는 말린 육포를 말하는데, 즉 말린 육포 열 다발의 예절이라는 뜻으로 스승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건네는 제자의 정성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린 육포 열 다발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뜻할까?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누군가를 만날 때 반드시 예로써 선물을 준비했는데, 속수는 예물 가운데서 가장 약소한 것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속수지례란 최소한의 가치를 지닌 예물을 말한다. 공자는 돈을 벌기 위해 제자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이들에게도 흔쾌히 가르침을 내렸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禮 란 인간 사회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 지금도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엄마들은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어느 선생님이 괜찮고, 어느 선생님이 별로라는 ‘호불호好不好’ 정보가 이미 파다하기 때문이다. 평판이 좋은 담임을 만난 엄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 바쁘고, 평판이 안 좋은 담임을 만난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가 된다. 우리 애가 혹시라도 미움을 살까 봐, 한번 찍히면 1년을 고생한다는데 어쩌나 싶어 그야말로 전전긍긍이다.


여기서 고민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라면 피부로 체감하겠지만 훌륭한 스승을 찾는 일은 무척 어렵다. 공부 스킬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은 돈으로 찾을 수 있어도, 인생의 멘토와 같은 참 스승을 찾는 것은 시쳇말로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힘들다. 그렇다면 내 아이의 참 스승을 찾기 힘들다면, 우리 스스로 좋은 선생님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의 방향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중학교 1학년이었던 성호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물었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까지 닭을 그려오라는데 닭을 어떻게 그리지?”

학교에서 김유정의 소설 『봄봄』을 공부하다가 선생님이 주인공이 닭을 쫓는 장면을 상상해서 그려오는 숙제를 냈던 것이다.

“성호, 닭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그리려니까 잘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성호가 직접 닭을 본 적이 있나 싶었다. 우리는 아주 당연시하게 여기는 것을 제대로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가?

그때 마침 우리 집 밑에 있는 그림 학원이 떠올랐다. 국전에 입상한 경력을 자랑하는 화가 선생님이 운영해 많은 아이들이 수강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이참에 성호에게 또 다른 좋은 경험을 선물하고 싶어 물었다.


“성호, 그림 배워보지 않을래?”


성호는 우물쭈물할 뿐 선뜻 내켜하지 않았다.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워낙 쑥스러워하고 낯선 것은 안 하려는 성격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성호 몰래 원장 선생님을 두 번이나 찾아가 만났다. 원장 선생님께 아이가 워낙 부끄러워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는 성격이지만, 우리 집 모토가 어쨌든 두 번은 해보자는 것이니까 최소한 두세 번은 아이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말하며 딱 한 가지만 부탁했다.


“선생님, 아이가 못 그려도 괜찮으니 꾸중보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세요.”


그런데 원장 선생님께서 내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씀을 하셨다.

“다른 어머님들은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하시거나, 수업 중에 장난치면 따끔하게 혼을 내달라고 하시는 게 대부분인데, 아이가 못 그려도 칭찬을 해달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네요.”


내 색다른 부탁 때문이었을까. 원장 선생님과 나는 어느새 자녀 교육에 관해 이런저런 말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성호를 화가로 키우고 싶은 욕심에 미술 학원에 보내려는 게 결코 아니었다. 정서를 살리는 연장선에서 좋은 교육 수단으로 만족할 뿐인데, 정서를 함양하는 배움 속에서조차 못 그린다고 혼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을 옳게 바라보고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방법 중에 하나이지 않은가. 다양한 색감을 배우면 무엇보다 아이의 눈이 밝아질 테니 말이다. 따라서 아이가 재밌게 놀면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취미로 삼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물론 그림을 통해 재능을 발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렵게 설득한 끝에 성호를 학원까지 데려간 나는 힙합 춤을 함께 배웠듯 성준이와 함께 학원에 등록을 하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우는 일은 정말 즐거웠다. 삐뚤삐뚤 대체 뭘 그렸는지 알쏭달쏭한 그림을 그리면서도 두 아이는 웃음꽃을 피웠다. 다른 아이들보다 못 그린다고 혼이 나지도 않고, 못 그리면 못 그리는 대로 선생님이 차근차근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니 안 좋아하고 배길 수가 있겠는가. 셋이서 학원에 갔다 돌아온 날이면 집에는 빨랫감이 그득했다. 서툰 글쟁이가 붓 타령한다고 얼굴이고, 손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온통 물감 칠을 해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 번은 옷에 튄 물감을 보고는 이왕 버린 거 옷에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해 옷에 유화 그림을 그리고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한 적도 있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신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술에 소질을 발견한 것은 성호도 성준이도 아닌 바로 나였다. 원장 선생님이 마흔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니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를 할 정도였다. 원장 선생님 제의처럼 그림 공부를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찾아주기 위한 부모의 노력이 왜 필요한지 절감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어릴 때 내가 내 재능을 깨닫게 도와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파리의 어느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혹시라도 어려서부터 내가 내 재능을 깨닫고 노력할 수 있었다면 꼭 안 되란 법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원장 선생님이 학원을 찾는 모든 아이를 칭찬과 격려로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그림을 무조건 잘 그리기를 바라는(그래야 학원에 보내는 돈이 아깝지 않은) 학부모는 엄한 교육을 바랄 테고, 선생님은 부모의 요구대로 당연히 엄하게 교육을 했다. 즉 똑같은 선생님이라도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란 자식에게 좋은 가르침을 베푸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공부를 잘 가르치고, 아이를 따뜻하게 대하고, 미래를 함께 고민하거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말 그대로 인생의 멘토 같은 좋은 선생님을 찾을 생각에 바쁘다. 그러나 노력해도 찾기가 힘들다면 생각을 바꿔, 내 아이에 맞는 선생님을 내가 만들 수 있는 노력을 해보자.

어떤 학생에게는 최고의 선생님이 내 아이에게는 최악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내 아이에게 맞는 최고의 선생님을 찾자. 엄마 스스로 내 아이에게 맞는 최고의 선생님을 만들 용기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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