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1.

by 신성화

구매한 물건들은 가방에 다 들어가서 여분의 가방은 필요 없었다. 가방 옆 주머니에서 잘 접힌 남색 가방을 꺼내 엄마에게 건네고, 나는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지금 걷는 속도라면 이번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금요일 낮은 월요일 낮과는 달랐다.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보다 역동적이고 활기찬 무언가가 내포된 듯 했다. 곧 주말이라는 기대감일까. 작은 실내공간이 아니라 큰 거리의 분위기도 날마다 바뀌는 것이었나. 매번 월요일 낮의 거리만 보던 내게 금요일 낮의 거리가 낯설었다. 내가 알던 동네가 아니라 다른 동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신호는 차례대로 돌아가지만 왠지 내 쪽만 늘 마지막 순번인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도시 안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에 놓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보게 되었다는 표현보다 안 볼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적절했다.


건물을 보게 된 건 처음 보는 간판 때문이었다. 낯선 간판 하나가 무심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번 주 월요일까지만 해도 저 간판은 없었으니, 화요일에서 목요일 사이에 생겼을 테지. 어쩌면 오늘 오전에 마무리 되었을지도. 간판과 위용. 한 번도 묶어서 생각한 적 없던, 어색한 조합의 단어.


나는 간판을 유심히 바라봤다. 옹기종기 모인 색색의 간판들 사이에서 홀로 하얀 바탕인 간판이 가로로 길게 뻗어있었다. 건물 벽에 붙어있는 일반적 크기의 간판을 서너 개 합친 것 만했다. 건물주가 가게를 차렸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컸다.


하얀 바탕에 검정색으로 또박또박 쓰여 있는 글자. 간판의 크기만큼이나 글씨도 커다랬다. 반듯하게 찍어낸 검은 글자가 현란한 서체로 이루어진 간판들 사이에서 오히려 돋보였다. 가독성이 매우 높은 색채 구성과 글씨 크기. 그럼에도 간판은 내게 전혀 정보를 전해주지 못했다. 간판의 흰 부분은 바탕이고, 검은 부분은 글씨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간판이 내 건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는 건 내 탓이 아니었다. 가게 주인이 간판을 외국어로 내 걸었기 때문이다. 간판은 본래 가게의 의미를 알릴 목적으로 만들어 지는 게 아닌가. 저 간판이 건 가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계속 간판을 바라봤다. 아무리 빤히 본다고 해도 간판이 지닌 의미가 내게 전해지기란 어려웠다. 한국어로 된 간판과 영어로 된 간판의 혼재는 익숙했지만, 읽을 수 없는 어느 나라의 글자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커다란 간판에서부터 공간이 밀려나고 있었다.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글자들이 나를 이 도시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기존 간판들의 조화를 단숨에 깨버린 것처럼. 내가 사는 곳이 완전히 바뀌고, 나는 한 순간에 낯선 거리에 잘못 떨어진 방랑자가 되었다. 처음 간 외국 거리에서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내겐 순간이동 능력이 없으니 이곳은 우리 동네가 맞았다. 그럼에도 밀려나는 공간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급히 횡단보도를 건너, 걸음을 서둘렀다. 난간을 붙잡고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어서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밀려난 공간이 나를 어딘가 먼 곳으로 보내버릴 것 같았다.


숨이 가빴다.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서는 데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타려던 지하철이 내려놓은 사람들이었다. 더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계단을 내려가니 스크린도어는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 지하철은 아직 도착 알림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골랐다.


계획했던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의자에 앉아 매고 있던 배낭을 벗어 무릎 위에 올렸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 읽기 위해 챙겨온 책을 꺼냈다. 서점에서 읽다가 덮어둔 부분을 펼쳤다. 스칼렛 오하라는 무엇을 하려나. 그녀라면 밀려났던 공간을 다시 제자리로 끌어올 수 있겠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글을 읽었다. 목을 축이듯 감정을 적셔갔다. 계속 줄어가는 심원이 완전히 메마르지 않도록.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니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가방을 앞으로 매고 스크린 도어 앞에 섰다. 내 앞에 선 사람은 세 명. 지하철이 내가 서 있는 곳을 앞머리부터 스쳐가며 속도를 줄였다. 나는 천천히 속도가 줄어드는 지하철 안을 얼핏 살폈다. 내가 타려는 3-4번 칸의 좌석은 이미 꽉 차 있고,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른 칸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플랫폼보다 답답하고 더운 공기에 싸인 객실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서 있는 사람들과 가능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 일을 먼저 지워냈다. 실례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할 일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볼 일도 없었다.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느 날 얼굴에 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