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1.

by 신성화

30분쯤 지났을까. 다리와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어느새 늘어난 사람들로 지하철 안의 공기가 답답했다. 가방 위에 걸쳐둔 채로 읽던 책에 표시를 해두고, 책을 덮었다. 목이 뻣뻣했다. 목을 좌우로 젖히며 굳은 부분에 자극을 줬다. 움찔.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음 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역이었다. 사람들이 다음 정거장에서 열리게 될 문 앞으로 하나 둘 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흐름을 따라 나도 문 쪽으로 옮겨 섰다.


역에 도착한 지하철 문이 열렸다.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를 움직이는 동안 채워진 공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빠져 나갔다. 썰물처럼 쓸려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도 떠밀려갔다. 빠져나온 움직임의 끄트머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지하철을 안을 채웠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멈춰 설 이유도 없었지만 멈춰 선다고 멈춰질 걸음도 아니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서점 안과는 다른, 복잡하고 정신없는 지하철 환승통로가 어지러웠다. 누가 직접적으로 내 등을 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움직이는 흐름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내가 내 발로 걷고 있는 게 맞나. 동동 떠서 공중에서 걸음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 같았다.


잔 발걸음으로 걷는 걸음이 다급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덩달아 바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환승을 위해 움직이는 무리들이 다시 자신을 태울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리 뒤에 가서 줄을 섰다. 줄이 길었다. 이번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놓치면 안 됐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곧 도착한 지하철이 늘 하던 행동을 반복했다. 안에 태우고 있던 사람들을 양껏 토해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다시 우겨넣었다. 사람들은 지하철 안에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들이었다. 문이 두어 번 여닫히다가 겨우 아귀를 맞추고 출발했다.


내 몫의 자리는 없었다. 다음 지하철을 타야만 했다. 도착하면 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계획된 시간이 자꾸 밀려나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다시 늘어나는 줄과 그 줄을 만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 졸이는 건 나 혼자인가. 왠지 초조했다.


다음 지하철은 앞서 지나간 지하철보다 사람이 적었다. 문이 열리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좌석에 앉은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다시 책을 펼쳤다. 책의 종이들이 살짝 울어있었다. 말도 안 돼. 보관용 책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속이 답답했다.


책을 다섯 장쯤 읽었을 때 좌우로 갈라진 책의 이음새 부분으로 손가락 세 개가 불쑥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었다. 내 책은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손가락 세 개에 힘없이 끌려갔다. 유유히 유영하던 물고기가 먹이인 줄 알고 미끼에 덤벼들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이건 미끼도 끼워지지 않은 바늘에 옆구리가 채여 뭍으로 끌려간 물고기처럼 억울한 상황이었다. 나는 책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마디가 툭 불거진 굵은 손가락 세 개의 주인과 마주했다.


내가 서 있는 곳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이런 식의 방해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발을 밟았나. 그랬으면 바로 사과를 했을테고, 발을 밟은 느낌 같은 건 없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일까. 읽고 있던 책을 끌어내릴 정도라면 무언가 큰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그러시죠?”


나는 당황스런 마음을 최대한 숨기며 물었다.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작고 빳빳한 명함을 건넸다. 작은 종이를 받아든 내가 의아함을 품고 적힌 글자를 읽었다. ◇◇◇ 주식회사라는 회사명과 박XX라는 이름 석 자, 02로 시작하는 회사 번호와 010으로 시작하는 핸드폰 번호가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메일주소와 팩스 주소도 적혀 있었지만 그 부분을 읽기도 전에 박XX아저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아가씨 얼굴에 꽃이 피었잖아요. 우리 회사에서 그와 비슷한 종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만들었어요. 효과를 본 사람이 제법 많아요. 내 지인의 아들도 아가씨와 비슷했는데 우리가 개발한 약을 쓰고 다 나았다니까. 인체에 무해한 것들로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 번 사용해 봐요.”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여 약의 재료와 효능이 담긴 설명서를 건넸다. 떠밀리듯 받아든 종이에 시선이 고정됐다. 종이 위에 쓰인 글씨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미 아저씨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며 수군거렸다. 나는 내가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을 잃은 채 손에 쥔 종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얼굴에 핀 붉은 꽃에서 전과는 다른 형태의 열감이 피어났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열기였다. 마치 오른쪽 볼이 터져 나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 볼 안에서 무언가가 나를 마구 두드려대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살펴보고 전화 드릴게요.”


대답을 건넨 입에 억지로 겨우 지어낸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입술의 뻣뻣함이 답변과 함께 어색하게 움직였다.


"꼭 전화해요."


아저씨가 신신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가방 옆구리를 열었다. 에펠탑이 그려진 남색 가방을 뺀 자리에 아저씨가 준 명함과 종이를 담았다. 차라리 가방을 담아올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가방을 다 채워왔으면 이런 것들을 받지 않았을까.


다시 읽고 있던 책을 들었다.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같은 줄을 읽고 또 읽었다. 스칼렛 오하라가 뭘 어쨌다고? 그녀가 갑자기 마주한 일이 어떤 일이라고? 스칼렛 오하라가, 스칼렛이, 그래 그녀가.


한국어로 쓰인 글자는 읽을 수 있었으나 뜻은 전혀 해석되지 않았다. 하얀 종이와 검은 글씨. 하얀 배경에 검게 적혀 있던, 읽지 못한 간판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책 뒤에 얼굴을 숨겼지만 수많은 시선이 내게 닿아있다는 걸 알았다. 지하철이 덜컹이며 내는 소리에 긴장한 채 움츠러든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판매왕을 목표로 하는 아저씨일 뿐이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일하는 아저씨이다. 투철한 직업정신이 발휘 되었을 뿐이다. 그저 그 뿐이다. 나와 비슷한 경우를 목격했고, 그저 나에게 정보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나는 책에 눈을 고정한 채 머릿속으로 온갖 합리화를 해댔다. 스칼렛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더 이상 책은 읽기 위한 게 아니었다. 내 얼굴에 피어난 꽃을 가려줄 가면이었으며, 무수한 시선을 막아내 줄 방패였다.


어떻게 내렸는지도 모르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도망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들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걸음을 서둘러서는 안 됐다. 의연해야 해. 나는 적당한 걸음으로 지하철을 빠져 나왔다. 도망치 듯 보여서는 안 됐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됐다.


‘도망치는 게 아니야.’


나는 속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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