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암막커튼이 드리워진 방 안은 여전히 밤이었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12월 29일 토요일 오후 4시 42분,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어제 저녁부터 한 일이라고는 누워 있기뿐이었다.
처음이었다.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아무 일도 안 한 건.
한 끼만 건너뛰어도 몹시 성을 내던 위장조차 잠잠하다.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온 몸이 무거웠다. 깊게 잠들지 못한 탓일까. 팔을 주무르며 배터리가 다 닳아가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몇 개의 메시지가 와 있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이불을 던져두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질질 끌려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작업실 거실의 커튼 한쪽을 여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매직아워였다. 사진이 멋스럽게 나온다는 시간. 내게는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아른아른한 시간. 낮이 끝나감과 동시에 밤이 시작되는 지점. 몽글몽글한 감정이 올라온다. 어정쩡하지만 아름다운 시간. 어정쩡하다는 말이 이도저도 아닌 것 같은 내 삶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시간이란 말과 나의 관계는, 잘 모르겠다.
해가 점점 낮게 깔리고 있다. 이내 먼 산 뒤로 사라진 태양이 길게 잔물결을 남긴다. 잠옷 위에 외투를 겹쳐 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잔뜩 부어있는 오른쪽 얼굴의 움직임이 어색했다.
붉게 물든 하늘을 검푸른 어둠이 지워낸다. 오늘의 해가 지는 건 아쉬우면서 밤이 온다는 사실이 반갑다. 서늘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 위에서 인사를 건넨다. 긴 밤을 함께 지새울 친구는 대답 없이 손만 흔드는 짙은 검정. 어두운 그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가 만난다. 어둔 밤을 맞을 그림자들의 조우가 고요하다.
낙엽이 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마치 구원을 바라는 손길을 내밀 듯 밑에서부터 위로 간절한 기운을 뿜어댔다. 높게 뻗을수록 더 먼저 어둠과 닿았고, 많이 뻗을수록 더 많은 어둠이 내렸다.
그들에게 닿은 잔인함은 짙은 푸른색에서 다른 색을 덧대기 힘든 검정색으로 잠식되어 갔다.
그림자끼리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만남. 그 끝은 시간의 흐름이 데려온다. 모든 것이 지나가듯이, 어둔 밤에 만난 그림자끼리의 만남은 아침이 밝아오면 사라질 것이다.
보다 빨리, 억지로 그림자를 지워내는 방법도 있다. 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 그와 나의 그림자를 전부 지워버리는 것. 깊고 깊은 어둠 속에 잠식한 채 모두 까맣게 칠해버리는 것.
그러나 그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다. 너무 깊은 어둠은, 그와 나의 그림자뿐만 아니라 그와 내가 모두 사라지는 곳이니. 차라리 이곳에서 밤새 말없는 인사를 나누며 그렇게 낮 동안 쌓인 무언가를 식히고, 식은 것을 다시 삭히고, 삭힌 것을 다시 삼켜야지. 삼킨 것이 온전히 소화가 될 때면 날은 밝아올 테니.
어둠이 내린 작업실 마당을 뒤로 하고 실내로 들어왔다. 무언가 먹으려 주방을 서성였지만 당최 입맛이 없었다. 입에 음식을 넣는다는 상상만으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이불 안에 들어가서 누웠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지만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의미 없이 손가락만 움직이다 보니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세 시간 동안 봤던 각종 가십거리들이 멍하게 흩어졌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없었다. 핸드폰을 어딘가에 던져두고 눈을 감았다.
빈틈으로 또 다시, 지난 시간들이 쌓아둔 무게가 몰려오고 있었다. 베개 위에 올려둔 새로 꺼낸 수건이 어제처럼 젖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