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2.

by 신성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몸을 녹이니 노곤함이 밀려왔다. 핸드폰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엄마가 보낸 메시지였다. 답장은 간단했다. 그래, 라는 한 마디. 나는 핸드폰을 한쪽에 두고 머리카락을 말렸다. 윙, 하는 드라이어의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려왔다.


머리를 바싹 말리, 거친 소리를 내던 드라이어를 껐다. 원래부터 조용하던 작업실 안은 더 고요해졌다. 드라이어를 정리해두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모아서 휴지통에 버렸다. 휴지통까지 걷는 몇 걸음 동안,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바닷가의 한 작업실이 지닌 적막함 안을 걸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거닐었다. 나는 작업실 안에서 이방인으로 머물고 싶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달 모양의 램프를 켜고, 모든 불을 다 껐다. 어둠 속에서 동그랗게 빛나는 불빛이 방안을 비추었다. 따뜻하게 덥혀진 이불 속으로 지친 몸을 뉘었다. 램프의 불빛이 은은했다. 삼촌의 트럭 안에서 들었던 피아노 연주곡의 음을 흥얼거렸다. 달빛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기억나는 짧은 선율을 몇 번 더 반복해서 불렀다.


바로 누웠던 몸을 팔꿈치로 지탱하고 상체를 세웠다. 팔을 뻗어 손끝에 닿은 램프의 스위치를 눌렀다. 방을 비추던 인공 달빛마저 사라졌다. 암막커튼이 드리워진 방 안은 깜깜했다. 입가에서 흥얼거리던 음마저 흐려졌다.

나는 바로 누웠던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다시 바로. 다시 옆으로. 먼 길을 오느라 몸은 피곤한데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 뒤척였다.


하루가 시작되었고,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몹시 길었던 하루의 끝.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다행이었는데, 나는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자세를 바꿔 누울 때마다 깨끗하게 빨아서 말린 잠옷에서 섬유유연제 향이 풍겨왔다. 벌써 몇 년째 쓰고 있는 L사의 장미향이었다. 익숙한 잠옷과 포근한 이불.


나는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섬유유연제 향이 한층 짙어졌다. 익숙한 것. 그 위로 작업실 안의 낯선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내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무언가 턱, 하고 나를 옭아맸다. 보이지 않게 조여 오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이 나를 칭칭 감아대고 있었다. 이불 안에서 움직임 없이 가만히 누워 있는데, 나는 발버둥치고 있었다. 가슴께를 한 번 조인 줄은 이제 목을 감아갔다. 호흡과 맥박은 안정적이었으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쉬고 있었다. 동시에 숨 쉬기가 힘들었다. 세상에. 숨 쉬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거였나.


얼굴에 핀 꽃이 화끈거렸다.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잔뜩 부풀 오른 꽃이 얼굴 한쪽을 터뜨릴 듯 했다. 오른쪽 뺨이 타들어가는 열기에 쩍쩍 갈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울 생각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흘려버린 눈물이었다. 내가 지금 왜 울고 있나. 뜻 모를 눈물에 당황스러웠다. 눈물이 줄지어 내려 베개 위에 깔아놓은 마른 수건 위를 적셨다.


이불을 한껏 끌어당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이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이불과 내가 맞닿은 곳에 조금의 빈틈도 없어야 해. 가만히 누워있던 나는 계속해서 이불을 끌어안았다. 일인용 이불의 면적만큼이 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의 전부였다. 이불과 나 사이에 빈틈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 나는 웅크리고 또 웅크려 뱃속에 자리한 태아처럼 둥그렇게 말렸다.


줄에 감긴 채 숨을 몰아쉬는 내가, 외투에 넣어둔 마스크를 꺼낼까 고민하는 찰나, 이불이 들썩였다. 그 바람에 이불과 나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나와 나는 동시에 안 돼, 라고 외치고 싶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외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생긴 틈으로 오늘 하루 만났던 사람들이 스멀스멀 기어 왔다. 기억에서 지워졌던, 혹은 지우려했던 지난 십 년 간의 일들이 이불틈새를 넓혀가며 쏟아졌다. 최대치로 웅크린 몸 위로, 기억의 편린들 스치며 나를 날카롭게 베어댔다.


모든 것들이 천천히, 아주 느리고도 느린 걸음으로 나를 헤집어댔다. 나와 내가 복잡하게 섞였다. 나는 잠들지 않은 상태로 악몽을 꾸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밟고 들쑤셔대는 내 안의 어딘가가 아파왔다. 나는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몹시 어지러웠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깜깜한 밤. 어두운 방. 틈이 생긴 이불 안에서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 눈물이 났다. 나는 울려고 한 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냥 눈물이 나고 있었다. 닦아내고, 닦아내도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누구든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덜컥, 삶이 느껴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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