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2.

by 신성화

다시 아침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거실 커튼을 젖혔다. 쨍하니 맑은 날씨였다. 창밖으로 햇살이 비춰 들었다. 간단히 세수와 양치질만 하고 외투를 걸쳐 입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안에 들어 있던 마스크를 꺼내 썼다. 여전히 열기가 가득한 채 부풀어 올라있는 꽃이 마스크 아래로 사라졌다.


문을 잠그고, 나는 마당을 가로로 지나쳐 작업실 뒤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란 숲이 있었다. 자연적으로 자라난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다. 흙이 단단했지만 낙엽이 쌓인 곳은 제법 폭신했다. 짙은 갈색으로 변한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의 빈 가지 위에 희정이가 달아놓은 분홍 리본이 드문드문 달려있었다. 길을 잃을 것 같다가도 곧 나타나는 분홍 리본에 안심하며, 계속 걸어 내려갔다.


겨울바다. 그 끝에 겨울바다가 있을 터였다.


20분쯤 걷고 나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길은 흙길이 아닌 돌길이었다. 나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 위를 걷고 있었다. 작은 산을 옮겨 놓은 것처럼 들쑥날쑥한 바위를 밟아가며 나는 바다에게로 갔다. 내가 멈춰선 그 자리의 바위와 푸른 바닷물이 맞닿아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바다는 잔잔했다. 바위에 닿는 파도의 철썩임도 얌전했다. 부서지는 포말이 햇살에 반짝였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고, 물거품은 부서져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멀리했다. 수평선의 경계가 뚜렷했다. 감청색 바다가 짙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 위로 펼쳐진 하늘은 바다보다 옅은 파란빛이었다.


나는 한참을 서있었다. 파란 하늘이 색을 흐리더니 순식간에 포말을 닮은 구름으로 채워졌다. 몰려온 구름은 모든 것을 뿌옇게 만들었고, 어둑해진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눈송이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하늘에서부터 직선으로 곧게 내리는 눈은 먼 곳의 배경을 흐려놓았다. 선명했던 수평선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경계가 흐려지고 나는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안에 갇혔다. 나는 음악이 흐르는 스노우볼 안에 장식된 인형이 된 것 같았다.


천천히 내리는 눈송이가 시각화된 시간의 흐름을 보였다. 내 주위로 내리는 눈이 악보 위에 새겨지는 음표처럼 저마다의 빠르기를 지니고 있었다. 각각의 눈송이가 떨어지는 동안의 시간. 나의 시간과 내리는 눈의 시간이 교차하는 순간. 내 시간의 흐름은 사회적 약속에 따라 1초씩 흐르고 있는데, 눈송이의 시간은 제 맘대로 움직였다. 그 시간의 빠르고 느림을 나는 잴 수 없었고, 다만 감각적으로 느꼈다.


세상에 나와 바다와 내리는 눈송이, 셋뿐이었다.


바다와 만나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는 관람객이 아니라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끼어든 불청객 같았다. 마구 흔들리는 스노우볼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쳤다. 나는 어디론가 튕겨져 나가지 않으려 버둥댔다.


바다는 끊임없이 눈송이를 집어 삼켰고, 뿌옇게 내리는 눈은 물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차라리 나도 저 눈송이처럼 녹아버린다면 어떨까. 내가 눈송이로 내린다면 어떨까. 有에서 無로, 다시 無에서 有로 향한다면. 有에서 有로, 다시 無에서 無로 돌아간다면. 온전히 바닷물과 하나로 합쳐져 내가 바닷물이 되고, 바닷물이 내가 된다면 지금의 상념들도 전부 사라지지 않을까.


나조차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껏 흘러간 생각을 자각하자 순간적으로 뇌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다에 몸이 잠기는 상상은 끔찍했다. 무서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면서 고개를 마구 저어 머릿속을 털어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됐다. 인간의 몸이 대부분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내가 눈송이일 수는 없었다. 동시에 바다일 수도 없었다.


언젠가 눈송이가 되고, 바다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인간이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내 몸이 바닷물에 녹기 전 아홉시 뉴스에 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 식으로 뉴스의 한 장면에 속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파도가 몰아치고 폭풍우 치는 바다가 무섭다는 건 누구나 안다. 사람들은 그때 바다에서 멀리 도망친다. 최대한 먼 곳으로. 멀리멀리.


하지만 고요한 바다는 사람을 부른다. 잔잔한 흐름으로 움직이는 바다는 시시각각 색을 바꿔가지만 그저 고요해 보일 뿐이다. 투명하고 맑은 물이 더해져 생긴 파란 바다. 파란 물의 깊고 깊은 곳은 어두컴컴한 검정. 덧붙여진 고요함이 더 무섭다는 걸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얼마나 이곳에 서 있던 걸까. 모자를 뒤집어 쓴 머리 위와 어깨 위에 눈이 살짝 쌓였다. 여전히 눈송이를 삼켜대는 바다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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