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업실로 돌아와 씻고나오니 갑자기 허기가 졌다. 주방으로 가서 찬장을 뒤적였다. 정리되어 있는 간편 조리 음식을 보니 다시 입맛이 가셨다. 어제 저녁처럼 쓴물이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밥을 먹는 건 무리였다. 조리 식품 옆에 놓인, 견과류가 들은 곡물 차를 한 봉지를 꺼냈다.
물이 끓는 동안 찻잔을 꺼내 분말가루를 잔에 넣어두고, 책을 두 권 다 꺼내왔다. 거실 한 쪽에 작은 상을 펼쳐두고 방석을 깔아두었다. 전기포트가 삐, 소리를 냈다. 찻잔에 물을 붓고, 거실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내리던 눈은 그쳤지만 창밖은 아직 흐렸다. 나는 읽다만 책을 펼쳐 1권의 끝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고 계속 책을 읽었다. 찻잔은 한참 전에 비어있었고, 지금은 2권 끝부분을 읽는 중이었다. 바닥에 그려졌던 햇살의 움직임이 내게로 닿았다. 하늘이 다시 파랬고, 구름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몇 시간 전에 봤던 풍경들이 모두 오래전 꾼 꿈속의 일처럼 멀었다.
은은함이 짙게 배인 햇살이 나를 차분히 비추었다. 발끝에 닿았던 빛이 금방 발목까지 올라왔다. 한겨울의 햇볕이 이렇게 따사로웠던가. 겨울 볕은 봄날의 생기, 여름날의 작열, 가을날의 풍성한 빛과는 달랐다. 한겨울과 따스함.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기막히게 어울렸다. 가장 추울 때,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햇살을 만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함이 새삼 놀라웠다.
들고 있던 책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책 안에서 펼쳐지는 스칼렛의 이야기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초점을 맞춰야할 순간이었다. 그것이 나의 이야기이므로. 지금은 누군가의 이야기보다 나의 이야기가 중요했으므로.
빛이 닿은 곳으로 손을 옮긴다. 손 위로 햇살이 내린다.
눈에 보이고, 따뜻함도 느껴지는 빛. 잡을 수는 없다. 손을 몇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빛을 잡겠다는 건 내 욕심이다.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던 욕심은 뭐였을까. 떠올려보나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을 바라는 게 욕심이었나. 내 행복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고, 돈도 잘 벌고, 각자의 행복을 이루며 사는 것. 이 정도인데. 생각해보니 엄청난 욕심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는 말이 왜 이리 무거운지.
사랑으로만, 행복으로만, 기쁨으로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미움도, 어떤 아픔도, 어떤 슬픔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을 바라는 건 욕심인가. 나는 나의 행복을 놓아야하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이유는 뭘까. 바랄 수 없는 걸 바라면서 살면 안 되나.
모르겠다.
나는 다시 미궁에 빠져 헤매고 있다. 생각의 결론이 항상 미로 속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명확히 답을 내려도 그 답은 미로 속에서 내린 결론일 뿐이었다. ‘이 길은 이미 지나갔음.’으로 표시해 두었지만 돌아 나와 보면 그 길에 여러 가지 길들이 덧붙어 있었다.
퍼지고 퍼져 나가는 생각들은 분명 내 생각의 속도일 텐데 자각하기엔 너무 빨랐다. 나는 이 비행기 안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생각들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창밖의 비행기가 나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도 같았다. 물리법칙이겠지만 그런 설명은 모르겠다. 문과였다는 핑계를 대며 간단히 말하는 게 편하겠지. ‘완전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