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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Apr 16. 2024

파이터 같았던 나의 미팅썰

(80년대 여고졸업반 시절 이야기)


드뎌 학력고사가 끝이 났다.

70명 가까운 학생들이 오밀조밀, 한 교실에 모여 좀 더 멋지고 폼나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당장의 쾌락과 편안함을 포기했던 3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우리 여고 5인방은 각자 대학이 결정되고 한동안 허탈한 마음에 두문불출하다, 처음으로 남학생들과 미팅자리가 성사되었다.

우리는 약간의 참가비를 내고 궁전제과점에서 5:5 단체미팅을 했다.

여자가 준비한 소지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남자들이 뽑아가는 가장 고전스런 방법으로 파트너를 정했다.

자줏빛 수국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냉큼 집어 내 파트너가 된 그 애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수일과 심순애(옛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수일’이라 소개했다.

우린 뭣도 모르고 시내에서 제일 높은 스카이라운드 스탠드바에 얼떨결에 올라가 버렸다.

독한 진토닉을 주문하며 잔뜩 긴장한 그 애는 ‘좋아하는 클래식이 뭐냐’며 목소리를 깔았고 ‘난 클래식 그런 거 잘 모른다’고 시크하게 응수했다.

‘무슨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냐’는 다음 질문에도 ‘감명 깊게 읽은 책 별로 없다’ 툭 내뱉었다.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전의를 상실한 그는 한동안 뒷말을 잇지 않더니 30분도 채우지 않고 툴툴 자리를 털며 나가자 말했다.

당연히 에프터는 없었고, 서로가 그저 그랬던 나의 첫 미팅은 그렇게 허무하게 '꽝'이 되고 말았다.   

   

첫 미팅 후, 한참 동안 그럴싸한 건수가 생기지 않자 우린 또 안달이 났다.     

  

“야~ 미팅 좀 알아봐야~, 어디 아는 남자들 없냐?  겁나 심심해 죽겄네~”     


이번에도 우리의 능력자 순이가 부랴부랴 건수 하나를 물어왔는데 신박했다.

단순한 미팅을 넘어 캠핑으로 이어지는 ‘캠핑팅’이라는 것!

미팅도 감지덕진데 남학생들과 캠핑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 허벅지를 몇 번이나 꼬집어 볼 모양새다.

우린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꽉 붙들어 메고 첫 만남 장소로 향했다.


비주얼 괜찮고, 스펙도 그만하면 soso고, 티키타카도 좀 되고, 한마디로 '괜찮았다'.

우린 서로 얘기가 잘 통해 캠핑을 실행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두 번째 만남은 캠핑 준비 겸 친밀감 다지기 시간이다.

예외 없이 내가 여자대표 겸 총무가 되었고, 남자 쪽에선 꼼꼼이 안경쟁이가 대표로 나섰다.

우리는 알콩달콩 여행장소와 메뉴를 정하고, 콩닥콩닥 파트너를 뽑고, 현실적인 여행경비도 셈하며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설레고 좋다'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오메 좋은 그~ 기대 만땅이다.


드디어 두두둥, 물 맑고 경치 좋은 계곡으로 캠핑을 떠났다.

아직은 어색한 사이였지만 서로의 솔선수범이 있어 큰 어려움 없이 그날 일정을 소화했다.

먼저, 맑은 계곡물에 쌀을 씻어 코펠에 밥을 짓고 감자와 양파로 된장국을 끓여 몇 가지 밑반찬과 함께 점심을 해결했고, 빙 둘러앉아 장기 자랑 게임과 간단한 레크리에이션으로 분위기도 풀었다.

속닥속닥 얘기꽃을 피우고,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노래도 부르고 물장구도 치고 막 그랬다.  

근처 놀이동산이 있어 놀이기구도 함께 타고 솜사탕도, 얼음과자도 사 먹으며 꿈같은 시간도 보냈다.

그런데,,,,

     

여기까진 좋았다. 딱 여기까지 좋았다.

갑자기 예상외의 경비가 발생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근처 매운탕집 저녁식사값과 여비 몇 군데에서 펑크가 난 것이다.

추가로 돈 문제가 발생하자 녀석들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책임감 없는 말본새로,


"야~ 우리는 지금 돈 없으니까 니들 돈으로 먼저 써라, 나중에 주께"

허걱~... 좀 찝찝했지만, 우리는 '나중에'란 말만 믿고 비상금을 털어 펑크 난 경비를 겨우 충당했다.


우린 '여행 뒤풀이'라 말하고 '돈 계산'이라는 속셈을 감추고선 네 번째 만남을 가졌다.

한동안 여행 뒷얘기와 이런저런 수다삼매경에 모두들 신이 났지만, 난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들이 돈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자 애가 다 탈 지경이었다.

없이 총무인 내가 또 총대를 메고 피할 수 없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야~ 니들 돈 갖고 왔냐? “

"잉? 뭔 돈? 그때 그걸로 끝난 거 아니었어?


“뭔 소리냐? 그건 경우가 아니재, 계산은 확실히 해야 고... ”  

"우리 돈 안 가지고 왔는데?"


"야~ 니들 그렇게 안 봤는데 매너가 그게 뭐다냐? "

"우리 매너가 뭐 어째서야?"


"와 진짜~ 니들 인생 그렇게 살지 말아라"

"뭐 고런 거 갖고 인생까지 들먹이냐?"


"암튼 계산은 계산이니까 존 말할 때 돈 줘야"

"오메 징한그~ 그만 하자~ 오늘은 돈 없어~ 다음에 주께"


한동안 분위기가 옥신각신 살벌했지만, 녀석들이 '또' 다음을 꼭 약속했기에 그래도 웃으며 헤어졌다.


다섯 번째 만남은 우리가 약속장소를 잡았다. 시내에서 제일 고급스런 레스토랑으로~

우린 다 계획이 있는 여자들이다.

출발 전 우리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눠졌다.

‘지들도 양심이 있으믄 이번에는 돈 갖고 올 것이다'라는 의견과  

'아니다, 고것들 이번에도 빈손으로 털래털래 나올 것이다'라는 의견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그 놈들은 털털 빈손으로 나와 턱 하니 약속장소에 앉아 있었다. (나오지나 말든지...)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그걸 대비해 우린 미리 작전 하나를 짜고 들어갔다.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음식을 시켜 먹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버리자는 거의 007 버금가는 작전.

우린 그날, 쓰윽쓰윽 스테이크를 썰어 맛있게 냠냠 먹고 난 후, 내 시그널을 시작으로 한 명씩 화장실 가는 척 냅다 집으로 줄행냥 쳐버렸다.


"야~ 니들처럼 지독한 가시나들 첨 봤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날 저녁 안경쟁이 총무 녀석이 우리 집으로 전화해 한 덕담(?)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캠핑팅은 달달한 로맨스로 시작해, 다섯 번의 만남을 끝으로 ‘사랑과 전쟁'처럼 진탕지게 싸우고 결국 '파이터팅'이 되고 말았다.  

'전쟁통에서도 사랑은 싹튼다'더니 울 민이랑 한 녀석이랑 꽁냥꽁냥했나 본데, 우리가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시어머니가 되어 '이 만남 결사반대다. 우리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안된다' 쌍오바를 떠는 통해 결국 시작도 못하고 바이바이했다는 슬픈 이야기만 남고 끝이 났다.


그때, 그 녀석들 눈에는 우리가 지독한 파이터처럼 보였겠지만, 지금 이렇게 괜찮은 여자들이 되어 있음을 안다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전문용어로,,,  '흥.칫.뿡.'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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