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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Mar 14. 2024

'여자의 일생'을 즐겨 부르던 여인(2)

* '여자의 일생'을 즐겨 부르던 여인(1) 이어진 내용입니다 *


엄마는 미인은 아니지만 작은 얼굴에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이 직모여서 난 엄마를 닮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유전자를 더 받아 각진 얼굴에 까무잡잡한 피부, 반곱슬을 가졌고 운도 지지리도 없이 아버지의 큰 키만을 닮지 못하고 째깐이가 되어 버렸다.(그렇다고 못생기진 않음. 귀엽고 사랑스럽다고들 함. ㅎㅎ)

하지만 세월이 지나 중년이 되니 사람들은 말했다     

“친정엄마를 많이 닮았구먼요”

역시 D. N. A는 무시 못 한다더니 어느 한구석이라도 엄마와 닮아 있었나 보다.    


엄마는 성격이 무던해서 매번 아버지를 복창 터지게 했지만 그런 성격이었기에 아버지의 꼬장함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으시고 자식이나 주변사람들에게 특별히 집착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엄마에게 딱히 야단을 맞지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듣지 않고 컸다.

그것은 자식교육에 대한 엄마의 철학이었다기보다 무관심이고 방관이었다.

당연히 매도 한번 맞아보지 않았는데, 대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지침이나 기본적인 예의범절, 사람으로서의 도리, 조언이나 방향성도 받아보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조금이라도 받은 자식이 있었다면 막내로 태어난 바로 나다.

엄마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밤봇짐을 싸실 때도 꼭 나만 데리고 나가셨다.

언니 오빠들도 따라가겠다고 그리 애원했지만 모두 매몰차게  내팽개치고 오직 내 손만을 붙들고 집을 나섰다.

쌀이 귀해 거의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그 시절에도 엄마는 아버지와 나만 보리밥 위에 살포시 얹어져 있는 쌀밥을 떠 주셨다.

아주 특별한 날, 닭 한 마리로 죽을 쒀 일곱 식구가 나눠 먹을 때도 닭다리는 꼭 아버지와 내 몫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려운 형편에도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고 그 모든 것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누렸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부터 기관기천식이라는 병을 앓고 계셔서 항상 골골하셨다.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약과 주사를 달고 사셨는데 재주 많은 아버지가 주사도 놓고 반의사 노릇을 다 하셨던 모양이다.

엄마가 아프시니 집안일은 당연히 큰 자식들 몫이 되었다.

큰언니는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큰오빠는 동생들 돌보는 일을 했다.

이처럼 병치레가 많았던 엄마를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할 거라 수군거렸다.(40을 못 넘길 거라고.)

대신, 건장한 아버지는 엄청 장수할 거라 부러워했다.

하지만 두 분은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신 분들이다.

체격 좋고 지병도 없으셨던 아버지와 그 형제분들은 징글 맞게 술과 친하다 보니 모두 회갑을 넘기지 못할 만큼 단명하셨지만 엄마는 달랐다.

오랜 지병에 대한 걱정으로 건강관리에 더 신경을 쓰셨고 공기 좋은 곳에 살면서 끊임없는 운동과 등산, 에어로빅으로 기초체력을 다지셨다. (나도 결혼 전까지 엄마와 함께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80세까지 아픈 곳 없이 팔팔 날아다니셔서 옛날 엄마를 아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팔순날, 어찌나 짱짱하게 춤을 추시고 음식도 잘 드시는지 하객들이 회갑연인줄 알았다며 농담 반 진담 반 혀를 내두르셨다.     

 

그러나 나이에는 장사 없는 듯, 80세 이후 급속도로 노쇠하셔서 무릎관절과 허리수술, 백내장 수술 등 나이 들면 거쳐 가는 수술은 다 하시고 마지막엔 위암 수술까지 하셨다.

다행히 회복했고 정신은 또렷하셔서 90세까지 우리도 잊어버리는 사소한 일들을 더 잘 기억하며, 성경 책도 열심히 읽고, 재미있는 연애소설도 찾으실 만큼 총총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화장실에서 크게 넘어져 공포의 고관절 수술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이 든 노인네가 고관절로 드러누우면 방법이 없을 거'라 걱정했다.

그 걱정대로, 엄마는 수술은 잘 되었지만 끝내 집으로 돌아오진 못했다.


종합병원에서 몇 달, 동네병원에서 몇 달, 요양병원에서 몇 달, 응급실에서 며칠,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보내고 난 후, 집이 아닌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셨다.

떠나시기 며칠 전까지 정신이 말짱하시어 엄마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 온전한 정신으로 작별인사를 하셨고, 그동안 못다 한 자식들의 사랑고백과 따뜻한 미소를 한 아름 받고 큰 고통 없이 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대충 큰 보따리 2개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한 보따리는 엄마의 이불과 옷가지들, 또 한 보따리는 온갖 병명이 적힌 약상자와 엄마 물건 몇 가지들.

엄마는 살아생전에도 군더더기 없이 검소하게 사셨듯 가신 뒤끝도 너무나 심플했다.

엄마의 통장엔 그간 병치레로 들어간 돈을 제외하고 약 2천만 원 정도가 들어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당신의 장례비를 그렇게 정확히 알고 딱 그만큼만 남기고 가셨을까?

우린 엄마가 남겨놓은 돈으로 당신의 장례를 치르고, 엄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셨던 낙지집에 가서 엄마가 자식들에게 차려준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우리는 눈물 없이 엄마의 밥상을 맛있게 먹자 약속했고, 실제로 땀까지 흘려가며 배불리 냠냠 먹었다.

이제 우리 5남매는, 깔끔하게 정리된 엄마의 유산 덕에 어떤 불협화음 없이 더욱더 돈독한 우애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엄마~

저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지요?

엄마 살아생전 저 효도 많이 했잖아요?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한들 뭐 하냐고 엄마가 맨날 말씀하셨잖아요?

이제 600원짜리 이 막둥이는 항상 그러했듯 제 앞가림 잘하면서 잘 먹고 잘살겠습니다.

엄마, see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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