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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Mar 08. 2024

'여자의 일생'을 즐겨 부르던 여인(1)

아침부터 불고기를 재고, 계란말이와 배추겉절이, 쇠고기 뭇국을 끓여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채웠다.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를 운전해 아들내미 원룸에 도착해, 그간 묵혀졌던 냉장고 음식을 싹 비우엄마표 내 신상음식들로 교체했다.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 널브러진 옷 가지 정리, 먼지 붙은 방바닥을 닦아낸 후, 마지막 화장실 청소까지 숨도 안 쉬고 달렸다.

아들놈이 아침도 안 먹었다기에 부랴부랴 점심까지 차려주고 나니 어느덧 다시 돌아와야 할 시간, 다음 약속이 있어 서둘러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거의 4시간을 한번 앉아보지도,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줄곧 일만 하다 돌아온 것 같다.

 

그러다 문득, 30년 전 엄마 모습이 오버랩됐.

신혼 초, 살림건사를 못해 매일 징징대던 막내딸 S.O.S에, 엄마가 2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우렁각시처럼 그 많은 일거리를 해치우고 가셨던 기억,

그때도 나처럼 엄마도  앉을 새도, 물 한잔 들이켤 새도 없이 줄기차게 일만 하시다 버스시간이 다 되었다며 훌쩍 가버리셨다.

'막내딸 시집보내느니 내가 가겄다더니 딱 그 짝이다' 이 말만을 남긴 채...

내가 아들놈의 엄마가 되어보니, 철부지 막내딸의 엄마였던 그녀가 그립고 그립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엄마는 내 울음버튼이다.

하여, 엄마얘기는 좀 자신 없는데 그래도 엄마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선명히 남아있을 때가 낫겠다 싶어 지금 용기를 내어본다.  


엄마는 정미소 사업을 하는 부농의 2남 2녀 중 첫째 딸로 태어나셨다.

위에는 외삼촌이 계시고 아래로는 이모 한 분, 그리고 배다른 막내외삼촌이 계시다.

1933년생인 엄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교사 밑에서 일본어를 배우셔서 일본어에 능통하셨고 운동신경이 뛰어나 학창 시절 달리기 선수로 맹활약하였다 한다.

집안형편이 여유로운 덕에 여학교까지 졸업하셔서 (지금 사범대 수준) 소학교 교사 자격증을 갖추신 엘리트시고 엄마 친구 대부분은 학교선생님이셨다.   


외갓집은 농사를 많이 짓고 일꾼도 많이 부리는 부농이었지만, 엄마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한다.

외할머니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후 외할아버지는 서둘러 새 할머니를 맞이하셨다.

부랴부랴 새장가를 가신 외할아버지는 학생이었던 외삼촌 마저 연상의 맞선녀와 결혼시키고 집안 살림을 통째로 큰아들내외에게 맡겨버리셨다.

복잡한 집안 살림은 아들내외에게 맡기고 새 할머니와 알콩달콩 살고 싶으셨던 외할아버지의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뿐이었다.

나이차이가 많지 않고 거의 동시에 새사람으로 들어온 새 할머니와 며느리(외숙모)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아웅다웅하신 바람에 집안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반복된 이 싸움의 승자는 매번 며느리였고, 견디다 못한 새 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설득해 그 많은 재산 일부를 아들에게 넘기고 당신들이 분가해 나가 버리셨다.


분가 후,  외할아버지는 몇 번의 사업실패로 참 힘들게 사셨다 하는데, 무책임한 외삼촌과 욕심 많은 외숙모는 끝내 모른 척 불효를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딸들의 의견이나 배려는 없었고, 그녀들은 속수무책 그들의 이권다툼의 소외자가 되었다.

최소한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가 된 엄마는 손수 수예를 놓아 용돈벌이를 했고, 하루빨리 시누이를 치워버리고 싶은 외숙모의 눈치가 날로 드세 지자 선택의 여지없이 아버지와의 결혼을 결심하셨다. (소학교 자리가 났었으나 외삼촌이 결혼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 한다)


변변한 혼수도 없이 시집갈 최소한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친정을 벗어나야 했던 울 엄마,

결혼하고서라도 보란 듯이 잘 살았어야 했는데 지지리도 힘들게 사셨다.

아버지의 긴 실업자 생활은 엄마의 자존심마저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죽기보다 싫었을 친정에서의 손 벌림에 외숙모의 경계와 괄시는 정말 노골적 이였다.

외갓집에만 가면 외숙모의 쌀쌀맞은 얼굴에 기가 눌려 수확도 없이 풀 죽은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던 엄마의 뒷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부농이셨지만 잘못 키운 아들과 잘못 드린 며느리에 밀려 뒷방신세가 된 외할아버지,

젊은 나이에 부잣집 후처로 들어와 부귀영화 한번 누리지 못하고 평생 파이터로 살아야 했던 새 할머니,

그사이에 태어난 불쌍한 우리 막내외삼촌,

일찍 친정엄마를 여의고 딸자식이라는 이유로 어떤 권리와 혜택도 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출가해야만 했던 엄마와 이모.

이렇게 외가 식구들은 굴곡지고 기구한 근대소설 속 비운의 주인공들처럼 살아갔다.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외삼촌과 외숙모도 딱히 행복한 노후를 맞이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그 많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생긴 불협화음으로 큰아들은 자살하고 나머지 자식들은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어 지금까지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산다 들었다.

참 인생무상이고 인과응보다.


엄마의 18번은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계모임 때면 엄마는 꼭 이 노래를 열창하셨고, 엄마 목소리는 꾀꼬리 같았으나 난 이 노래가 싫었다.

엄마의 선창으로 시작된 이 노래는 합창으로 이어지다 결국 눈물을 훔치는 아줌마들로 마무리되었다.

'왜 엄마들은 이런 청승맞은 노래를 부르실까?'


(2. '여자의 일생'을 즐겨 부르던 여인 - 계속됩니다) *사진이미지: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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