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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Apr 30. 2024

나는 47살에 특수교사가 되었다(1)

늦은 결혼을 하고, 어렵사리 아이들을 얻고, 난 매일 아침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하루의 문을 열고 어스름 석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이가 회사에 출근해 가장으로서 착실하게 밥벌이를 해오면, 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알뜰살뜰 집안을 살피는 전업주부로서 그의 수고에 보답했다.

그러나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부족할 것 없는 완전체 같은 우리의 보금자리, 어제와 같은 오늘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 삶에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찾아왔다.

IMF여파를 타고 그이가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이와 내 나이 39살, 첫째 5살, 둘째가 3살 때의 일이었다.


‘아~우리 가정이 흔들릴 수도 있겠구나~ 나도 뭔가를 해야겠구나~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니 마음 급해지며 그간 잊고 있었던 내 능력과 커리어가 되짚어지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로 잠시 몸담았던 특수학교 기간제교사, 짧은 기간이었지만 너무 의미 있는 경험이어서 '왜 이 길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뒤늦은 아쉬움까지 들었던 그때가 문뜩 떠올랐다.

무작정 인터넷에서 특수학교를 검색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채용공고가 떠있는 몇몇 학교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여느 날처럼 동네 엄마들과 늦게까지 커피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 이력서를 낸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기다렸던 소식이었건만 막상 출근해야 한다 생각하니 아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밟혔다.

하지만 이 어린 꼬맹이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주변의 걱정과 우려를 뒤로한 채 무조건 '가겠다' 말했다.

난 친정엄마 찬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동네 엄마들에게도 몇 가지 손을 부탁하며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출근 바로 전날, '미안하지만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아야 했다.

이유인즉, 내가 특수 자격증이 아닌 일반교사 자격증 소유자였기에 채용이 불발됐다는 비보(?)였다.

그 부산을 떨며 어렵게 용기를 내었는데 한동안 맥이 빠져 멍~하니 몇 날을 보냈다.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애들 유치원 보내고 엄마들과 수다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나를 퇴짜 놓은 바로 그 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아주 급하게 2개월 기간제 자리가 났다며, 다시 와줄 수 없겠냐는~'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시 취소되는 일이 또 있더라도 무조건 '알겠다'며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2개월짜리 기간제지만) 그 단단하고 높게만 보였던 학교라는 조직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뭔지 모를 낯섦과 냉담함을 마주해야 했다.

특수교사 자격증이 없는, 어찌 보면 무자격자 신세인 기간제 교사라는 처지~

10년간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 입장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다.


어찌어찌 2개월의 경험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다.

다행히, 한번 맺은 인연은 헛되지 않은 듯 학교에서는 급하게 내가 필요할 때마다 콜을 보내왔다.

나는 아무리 짧은 기간, 어려운 학년, 힘든 근무조건이라도 무조건 '감사하다'며 부르는 족족 달려 나갔다.

학교에서는 이런 진심을 알아주었고 보답처럼 나를 부르는 빈도가 잦아졌지만, 무자격자 신세였던 나는 괜한 자격지심에 자꾸만 고개가 밑으로 떨구어졌다.

’ 그래~ 기간제라도 떳떳하게 하려면 특수교사 자격증을 따는 거야~ ‘


그때부터 나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번 대학원 문턱을 두드려 보았지만 그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광주와 전남, 심지어 영남에 소재한 대학원까지 무려 4번의 도전을 거듭했지만 번번이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 말았다. (특수대학원 문턱이 엄청 높은 시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5번의 도전에서 나는 OO대학교 2006 학번 특수교육과 대학원 새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 42살~

합격의 기쁨도 잠시, 앞으로 3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어떻게 버텨내야 할걱정부터 앞섰다.

'조카뻘 된 동기들과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 논문은 어떻게 통과하고 영어시험은 또 어떻게?'

별수 없이 ‘닥치면 다 한다’는 내 평소 지론을 발휘하여 또 한 번 힘을 내보는 수밖에 없었다.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서 과대표까지 맡게 되어 매일이 천방지축, 실수연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불타는 학구열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자부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낮에는 기간제교사를 하며 내 학비를 벌었고, 저녁에는 전문상담교사 양성과정에 입학해 또 하나의 자격증에 추가로 도전했다.

도대체 나는 그때 1인 몇 역을 했는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 출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까지 상담교사양성과정을 들으며 녹초가 다 된 몸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 그이까지 온 가족이 동원되어 내 살림과 육아에 힘써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깊숙이 묵혀둔 장롱 속 운전면허증까지 꺼내 들고 경험도 없는 초보운전자 주제에 겁도 없이 밤운전도 마다하지 않고 씩씩하게 도로 위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숨 가쁘고 열정적이며 최고로 치열한 나날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때의 그 모든 순간들은 과연 나의 선택인가 아니면 운명인가?"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니 그 멀고도 아득할 것만 같았던 졸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특수교사자격증’을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학원 졸업식날, 한 손엔 그 귀한 자격증을 들고 또 한 손엔 그이가 전해준 장미꽃다발을 들고 사랑하는 내 가족과 함께 그 순간을 맘껏 자축했다.


인간의 욕구는 정말 끝이 없나 보다.

시작은 당당히 특수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기간제라도 맘 편하게 해 보자였는데 마음이 변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임용에 도전해 보는 거야~ 어차피 인생은 도전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미처 식지도 않은 따끈따끈한 자격증을 옆에 끼고 또다시 ‘특수교육학’ 전공책을 펼쳐 들었다.

내가 앞장서 동기생 몇 명과 스터디를 결성하고 인강도 신청하며 본격적인 임용준비에 돌입했다.

내 졸업과 동시에 이런 정신없는 생활도 끝이 날 거라 기대했던 그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내 계획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행히 그이도 가족들도 내 결정에 길게 토를 달지 않고 언제든 내가 손을 내밀면 한걸음에 달려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함께 근무했던 몇몇 선생님들과 학교 관리자는 내 도전을 무모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oo선생, 뭐 얼마나 해 먹는다고 그 나이에 임용을 볼라고 하시오, 그냥 편하게 왔다 갔다 기간제나 하시지.."


'그런 소리 마세요~ 저는 단 1년이라도 정교사로 해 먹고 싶어요. 이제 더 이상 보따리 기간제는 싫어요~' 나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 이어진 이야기는 다음 주 화요일에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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