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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May 07. 2024

나는 47살에 특수교사가 되었다(2)

* 나는 47살에 특수교사가 되었다(1)과 함께 읽어주시면 아~주 칭찬합니다 *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살았던 3년 동안, 난 상담과 특수자격증을 동시 취득했기에 그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먼저 상담교사로 3번의 임용에 도전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수 차로 3번 연속 실패하다 보니 역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하여 미련 없이 특수교사로 진로를 틀었다.

 

특수교사 임용 첫 번째 도전지역은 서울,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TO가 제일 많은 서울을 택했지만 1차 시험부터 쭈욱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다음 해는 전라북도,

합격만 할 수 있다면 평양에라도 가고 싶었을 만큼 절실했던 그때였다.

그곳에서도 여지없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첫수는 그렇다 치고 재수 땐 좀 기대를 했고 나름 자신도 있었건만 임용이라는 것이 그 정도 실력으론 합격할 수준이 아니었나 보다.


어느덧 내 나이 45세로 접어들었다.

결국 상담교사로 3번, 특수교사로서 2번의 도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난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임용은 어김없이 1년에 한 번씩 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도전은 내 인생의 덤인 것이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만약 그때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했다면 제풀에 지쳐 도저히 그 긴 수험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다.

‘50까지 해보는 거지 뭐~’

이리 생각하니 나의 반복된 도전은 그냥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삼수째, 지역에 상관 말고 맘 편하게 가까운 지역으로 응시하자 결심했다.

1차 시험을 치르고 옆짝꿍 선생님에게 가채점을 부탁하며 그닥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채점을 해주던 선생님이,


"어?~ 선생님.. 점수가 높은데요?"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리 없다며 내 점수를 계산해 보니 어느덧 예상 컷을 넘어서고 있었다.

처음으로 1차 시험 합격 맛을 본 것이다.

설마 하고 미처 2차까지 준비하지 않았던 나는 그때부터 숨이 막힐 정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간 동안 (미안한 얘기지만) 교사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본분도 잊은 채 오로지 2차 시험에만 미친 듯이 몰두했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수업 외의 시간은 내 자리에 푹 파묻혀 오로지 공부만 했고, 퇴근 후에는 학교에서 다시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우리 지역 안 가본 도서관이 없을 정도다)

2차 시험도 컷보다 높은 점수로 무난히 통과했다.   

이제 수업시연과 면접을 치르는 마지막 관문, 3차 시험만 남아 있었다.

나는 급한 대로 3차 대비 스터디를 또 결성했다.

겨울방학 중 텅 빈 학교 교실 한 칸을 대여받아 매일 수업시연과 면접을 준비했다.

아무리 몸이 힘이 들어도,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하루도 빠짐없이 지도안을 짜서 수업시연을 해보고, 예상면접 답안을 달달 외우고 또 외웠다.


전날 내린 눈으로 도로가 꽁꽁 얼어붙은 그날도, 나는 운전도 못하는 주제에 차를 몰고 스터디 장에 가다가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 채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폐차될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큰 사고가 났건만 천만다행 내 몸은 멀쩡했고 차만 그 지경이 되었다.

나는 그이에게 연락해 사고처리를 부탁해 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스터디 장으로 달려갔다.   

하늘도 내 노력을 가상히 여겼을까?

3차 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되어 나는 그렇게도 꿈만 같았던 최종합격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나 정말 합격한 거야? 정말이야? 설마 꿈 아니지?"


나는 몇 번이나 묻고 또 물었고, 그이는 그런 나를 둘러메고 온 방안을 빙빙 돌았고, 꼬맹이들은 옆에서 깔깔 박수를 쳤다.

그날 우리 가족은 늦은 밤까지 치맥파티를 하며 흥분 속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당당히 2011년 공립 특수 정교사가 되었다.

내 나이 47세 때의 일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던 제2의 삶의 도전, 나의 특수교사 입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합격소식은 동네방네 큰 이슈가 되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그것도 기간제교사까지 하면서, 아이를 두 명이나 둔 가정주부가 그 높고도 높은 임용의 벽을 넘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많이들 추켜세워 주었다.

심지어 지역신문에라도 나와야 되지 않겠냐며 나보다 더 흥분한 사람도 있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편 내 합격으로 희망과 용기를 얻은 사람도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좌절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들었다.

하지만 난 말할 수 있다.

'내 노력과 피땀으로 일궈낸 이 결과와 영광을 나 충분한 누릴 자격이 있다'고.

 

내 합격으로 나와 우리 가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개인적으론 내 삶에 대한 자존감의 회복이었다. 

늦은 결혼, 어려운 아이 출산, 그이의 이직으로 힘을 잃어가던 나에게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느꼈던 상대적 좌절감과, 한때의 승승장구를(대기업에서) 운이나 타인의 배려로 낮게 평가하고 싶어 했던 그들에게 난 철저히 검증해 보이고 싶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복수(?)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가정은 내 취업으로 더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이도 내 든든한 지원과 독려를 받으며 평소에 도전하고픈 전문자격증에 응시할 수 있었고, 고맙게도 무난히 합격해 주었다.

지금 그 자격증을 바탕으로 우리 집안의 밥벌이를 톡톡히 해주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의 삶에 대한 집요함과 치열함은 정녕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고. 

난 잠시 생각에 잠기겠지, 그리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타고난 나의 성향 아닐까요?’

그때의 그 도전은 좀 더 나은 나로 살기 위해 좀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치열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 애티튜드다.

그리고 덧붙여 말할 것이다

‘위기가 기회를 만들었던 것 아닐까요?’

그때 그이의 갑작스런 이직이 없었다면 난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여느 여자들처럼 평범한 삶에 안주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이런 선택과 결과에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은 우리 아이들이었다.

흔들릴 수 있었던 불안정한 가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자라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 버팀목으로 서있고 싶었던 '부모'라는 이름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대단한 엄마를 가졌다'며 그 고마움을 아낌없이 표현해 주고 있다.

그때의 엄마를 옆에서 지켜봤던 울 딸내미도 자신의 진로를 선생님으로 결정했고,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지금 13년 차 특수교사로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좀 힘든 아이들이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하고 세상 사랑스럽고 귀여운 녀석들이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의 내 삶은 정말 축복의 연속인 듯 과분하고 감사하다.

이제 또 하나의 욕심을 부려보자면, 내 이런 생활이 변함없이 쭈욱 이어져 무탈하게 약속된 정년을 맞이하는 것이다.

"Is that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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