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랑한 마시멜로우 May 20. 2024

어머니, '옥희'가 누구예요?

어머니는 긴 세월 치매를 앓으시다, 요양원에서 마지막 심정지를 맞으실 때까지, 가장 많이 부르시고 찾으신 이름이 옥희였다.

당신 딸에게도, 며느리인 내게도, 요양보호사님에게도,

    

"옥희냐? 옥희 왔냐? 옥희 왔소?" 하셨다.


우리는 도대체 옥희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어머니~ 옥희가 누구예요?’ 묻 했다.

어머니의 대답은 항상 3마디 돌림노래처럼 반복되었다.


“아따~ 내 소학교 친구 아니냐?”

그렁께... 그때 그 우리 옆집 새댁이었재~”

“옥희? 고년? 니 아부지 거시기 아니드라고. 고년 만나기만 해봐라.”

    

우린 이 세 사람 중, 심정적으로 아버님의 거시기가 아닐까 강하게 추측해 볼 뿐이다.

무튼, 그 옥희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은, 아니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름은 아니었을까.


프러포즈에 엉겁결에 결혼을 약속한 그가 집으로 초대한 날, 거봉 한 상자를 들고 찾아간 아가씨를 어머니는 양말발로 맞이해 주셨다.

미리 기별이 닿았는지 시숙님 내외분도 함께였다.

형님이 간단한 다과상을 내오고 몇 마디를 이어가던 중, 어머니는 갑자기 벽걸이 달력을 떼오시며 말하셨다.  


“빨리 날 잡아야지? 언제가 좋겄는고?"   

  

어맛~ 간단한 인사만 드리러 온 자리였는데, 성격 급한 어머니 덕에 우린 그날 결혼 날짜까지 잡아버렸다.

그때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는 매서운(?) 눈이 있었는데, 바로 위 형님내외분이셨다.

형님은 본인 드리실 땐 어머니의 반대로 엄청 맘고생 심했는데, 우리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날짜 먼저 잡으려 하시자 입을 대빨로 내밀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어머니는 키는 작지만 야물어 보이는 내 인상이 그리 싫지 않으셨나 보다.  


그렇게 어머니의 첫 환대를 시작으로 나는 결혼생활 내내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을 아낌없이 받았다.

우리 집 냉장고 음식은 모두 ‘메이드 인 시어머니’고 웬만한 살림살이도 어머니의 정성과 센스로 채워져 갔다.

나 또한 어머니 찾아뵙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국물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가 싸주신 음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요긴하게 챙겨 들고 갔다.

남들은 시댁에 ‘시’ 자가 들어가는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지만 나는 본래 시금치를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머니 음식이 친정엄마 것 보다 더 내 입맛에 맞고 달았다.   

당연히 나는 시댁 가는 것에 군소리 없었고, 그런 둘째 며느리가 예쁘셨는지 어머니는 내게 어떤 부담스런 요구나 미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일하기도 힘들 탠데 푹 쉬었다 가거라잉, 이리 자주 오는 것도 어디다냐~' 말씀하셨다.


그러니 시댁 가는 것이 친정만큼이나 깃털처럼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어머니는 나와 형님 사이에서 참 어려운 역할을 하셨다.

나의 고추당초 시집살이는 어머니보다 동서형님에게서 더 매섭게 나왔다.

형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마땅치 않아 했고 나오는 말마다 가시가 돋아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 틈새에서 나이 드신 어머니가 얼마나 긴장하며 사셨을까?

어떻게든 집안 시끄럽지 않게, 서로 상처받지 않도록 무진장 애쓰신 참 어른이셨다.

어머니는 한 번도 두 며느리 사이에서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고 어떤 말도 시시콜콜 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어머니의 이 한 말씀으로 난 어머니의 마음을 다 알 것도 같았다.


“너도 형님 시집살이가 힘들었겠지만, 나도 며느리 시집살이로 힘들었어야...”


내가 2년 동안 4번의 유산을 겪어낼 때도 어머니는 내 맘고생에 조금이라도 보태지지 않을까 최대한 조심하며 숨죽이셨다.

대신, 애기 없어도 괜찮다며, 아무 생각 말고 건강에만 신경 쓰게 하라며 그이에게만 조용히 당부하셨다.

나는 떡례(딸내미)를 낳고서야 어머니가 얼마나 우리를 애달파하고 우리 아이를 기다리셨는지 알게 되었다.

무사히 아이를 낳아 어머니 품에 안겨드렸을 때 어머니의 울 떡례 사랑은 모두의 질투의 대상이 될 만큼 유난스러웠다. (그렇게 유난스러운 분이 아니신데,,,)

열명이 넘는 손주들이 이미 있었지만 어머니 곁에 한참 늦게 도착한 지각생 떡례를 첫 손주 보시듯 애지중지, 어화둥둥하셨다.


내가 10년에 걸쳐 기간제 교사, 대학원 진학, 임용준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자 어머니도 덩달아 바쁘셨다.

형편껏 금전적인 보템을 주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살림을 도맡아 주셨으며, 혹여 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되려 내 눈치까지 살피며 도움을 주셨다.

내가 47살에 임용에 합격했다는 소식에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로 그날 노인회관에 떡과 과일을 돌려버리는 바람에 나의 등장보다 동네방네 소문이 먼저 가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크고 많은 사랑을....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가시면서 종종 당신의 노후에 대해 걱정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요양원은 가기 싫어야~ 그렇다고 니 형님 하고도 못 살 것 같어야~"


그 말씀에, 나는 혹여 우리가 어머니를 책임져야 할까 봐 오만 핑곗거리를 생각하며 눈을 피하곤 했다.

'버젓이 장남이 있는데 둘째인 우리가 모신다는 것도 모양새가 그렇지 않은가?

혹여 나중에 모시게 되드라도 미리 약조를 드리는 것도 아닌 거 같고...'


하지만 어머니는 형님 차지도 내 차지가 되기도 전에 너무 빠른 나이에(75세) 치매라는 불청객을 들이셨다.

그리 싫다셨던 요양원에 거의 8년을 몸담으셨고(그전엔 딸들이 어머니를 모셨다), 우리가 마지막 임종을 지켜볼 새도 없이 동트기 전 새벽녘 요양원에서 혼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요양원에서 마지막으로 뵙던 날, 유난히 컨디션이 좋아 보여 안심하고 있던 차에 갑가지 날아온 비보였다.

나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그렁그렁 고인 눈물 뒤끝으로 염치없는 통곡을 했다.

당신 살아생전 그리도 듣고 싶으셨을 '어머니, 저희가 모실게요. 저희가 있잖아요' 이 말, 결국 빈말이 되고 말았을 이 말을 왜 그땐 하지 못했을까 아니, 안 했을까 한없이 자책하며....

열 자식 한부모 못 모시고,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고, 아들자식 놈 다 소용없다는 말들이 새삼 아프게 다가와  가슴에 불덩이로 내려앉았다.


평소 말수가 별로 없으셨던 어머니는 정신이 맑지 않게 되면서 봇물 터지듯 많은 얘기들을 쏟아부으셨다.

그 봇물 사이로 난 아버님의 외도와 아버님의 거시기에 대해 드믄드믄 엿들을 수 있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은 잠깐, 아니 좀 길게, 한눈을 파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경제력 없이 주렁주렁 아이들을 건사할 자신이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님의 외도를 모른 척 눈감으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런데 공무원 감찰관이 아버님의 외도를 확인하러 왔고, 젊고 미인이신 어머니를 되려 아버님의 외도녀로 오해하는 두 배의 억울함을 겪게 되셨고, 감찰관이 어머니의 진짜 존재를 알고서는 '그런 일 없었냐?' 묻자 '절대 그런 일 없다'며 딱 잡아떼기까지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용서(?)와 현명함(?)으로 직장에서 살아남으신 아버님은 뒤늦게 본집으로 돌아오셔서 가정과 처자식을 지키셨지만, 그때 깊숙이 눌러 둔 어머니의 배신감과 상처는 이성이 힘을 잃어갈 때부터 봇물이 되어 넘쳐흐르고 흘렀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여전히 ‘옥희’라는 분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85년간의 생에서 가장 강하게 각인된 3명의 옥희가 존재했으리라~

어린 시절, 꽃들판을 까르르 뛰어다니며 미래를 함께 꿈꾸었을 소학교 친구 옥희와,

꽃다운 18살에 시집와 퍽퍽한 신혼살림에 함께 울고 웃었을 이웃집 새댁 옥희,

그리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마지막까지 입가에 맴도는 아버님의 외도녀였던 옥희~ 온전한 정신일 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정신이 흐릿하신 후에야 고장 난 녹음기처럼 수없이 되뇌어야 했을 그 이름~.

             

어머니는 지금 머나먼 하늘정원에서 어떤 옥희를 만나고 계실까?

소학교 동무를 만났을까, 이웃집 새댁을 만났을까, 어머니의 그년이면서 아버님의 거시기를 만났을까?     

어떤 옥희를 만나셨든 그곳에서는 평안한 마음으로 어떤 미움도 없이 모두가 사이좋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대신 아버님은 빠지고~)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47살에 특수교사가 되었다(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