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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Sep 24. 2024

3명의 여자 때문에 3번 운 아들.

                                                         (사진: 다음 이미지)


브런치에 찐친이 생겼다.

얼굴도, 본명도, 사는 곳 모르는 브런치 마을 나름 친한 사람이 생겼다.

 그들의 글이 올라오면 백화점 신상만큼 반기며 라이킷과 댓글을 단다.

그분들도 매 한 가지다.

 글을 읽고 라이킷과 댓글, 대댓글로 보답을 한다.

굳이 품앗이라기보다 서로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공감한다는 말이 더 옳다.


나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다음 글에 대한 막막함이 몰려올 때 내 작가님들 글을 다시 한번 살핀다.

그럼 거짓말처럼 '잉? 아하!' 반짝반짝 빛이 나고 볼록렌즈처럼  튀어나온 글감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발자꾹 작가님의 '걱정쟁이 엄마의 사랑편지(군대 간 아들에게 쓴 편지 글)'를 읽고 이 글을 쓴다.

또 모른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나처럼 새로운 글을 시작하게 될지도?


힙합을 한다 크루에 가입한다 천방지축 날뛰는 아들놈을 어찌어찌 다독여 지방 국립대에 보내놓았다.

'대학만 가자. 그러면 그때 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급한 마음에 각종 공수표를 날려 대학 문턱을 겨우 넘겨 났지만 설마 네가 그 정도로 다하고 다닐 줄 몰랐다.

3개월을 못 넘겨 여자 친구를 체인지하고, 보컬학원에서 음반을 취입하겠다, 기타 연주회를 열겠다, 온갖 몸만들기 프로젝트로 복싱과 헬스는 기본, 학교 동아리 3~4개 활동까지, 녀석의 시간은 선미(가수)의 '24시간이 모자라'였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뒷전, 녀석 허리춤에 무겁게 달고 다니는 쌍권총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다 대학 졸업장도 구경 못하고 낙마할 각, 신랑과 난 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놈을 대한민국 아들로 만들어 나라를 지키게 하자'


그렇게 아들을 군에 보냈다.

녀석도 순순히 받아들였고, 군소리 없이 그간 벌려놓은 일들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녀석이 입대를 한 달 앞두고 새로운 여자 친구를 또 만들 줄은 몰랐다.


"야~너 그새를 못 참고 여자를 만드냐? "


"에헤이~ 엄마 왜 그래에? 그래도 편지 보낼 곰신은 만들고 입대해야지이~"

(*곰신:남자 친구가 의무 복무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자친구를 가리키는 말, 고무신의 준 말.)


무튼 녀석은, 그 곰신과 짧은 한 달  뜨겁게 연애를 한 후 논산훈련소에 들어갔다.

코로나 시국이라 입소식이 생략되고 우리는 훈련소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눈물에 이별식을 했다.

눈물범벅 젖은 눈을 보고도 맨 눈만 껌뻑이는 녀석을 보니, 서운함 보다 '아~ 진짜 싸나가 다 되었구나' 더 멋져 보여 하트가 뿅뿅 튕겨져 나올 판이다.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아들은 마지막으로 통화할 사람이 있다며 내게 핸드폰을 가져갔다.

핸드폰 너머로 앳된 여자애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 의젓했던 아들놈이 갑자기  'OO아(새 여친 )~ OO아~' 거의 조인성급으로 주먹을 입에 넣으며 통곡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내 앞에서.

'아~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22년 키운 네 엄마보다 한 달 사귄 여친과 이별이 그리 슬프더냐 이놈아?'

 

녀석은 군사훈련 6주를 마치고 상무대에서 4주간 자주포 정비병 특기교육을 받았다.

교육 후, 운 좋게 자주포 정비조교로 선발되어 집과 가까운 상무대로 자대배치가 확정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한통씩 인편을 보내기 시작했다.

녀석만 편지를 적게 받으면 기죽을까 봐 신랑과 딸내미까지 닦달하여 뭉텅이 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다.

그러나 나는 아들에게 곰신이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곰신도 매일 편지를 보냈고,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온 편지가 넘쳐나 배달사병에게 눈총 아닌 눈총을 받았다 한다. (짜아식~ 그놈에 인기는....)


녀석은 첫 휴가부터 집에 오지 못했다.

코로나가 너무 창궐하여 휴가나 면회가 엄격히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전화나 편지로 아쉬운 맘을 달랠 수밖에 없었지만 곰신은 달랐다.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남자 친구를 기다리기엔 너무 예쁘고 젊은 여자였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 했던가?

글과 목소리로만 서로의 감정을 나누다 보니 서운함이 쌓여가고, 인내력도 바닥이 났고, 그러다 결국 그 커플은 첫 휴가도 맞아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그러려고 그 난리를 쳤단 말이냐? 훈련소 들어갈 때 흘린 눈물이 아깝다 이놈아'


아들 입대 전 우리 가족은 다섯이었다.  

신랑과 나, 딸내미, 아들내미, 그리고 우리 집 막내딸 뚜리(반려견).

뚜리는 까망 믹스 유기견으로, 나 몰래 셋이서 작당모의하여 입양해 데리고 온 강아지다.

난 사실 반려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누구보다 사랑으로 키웠다.

그렇게 다섯이 된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고 스윗한 패밀리로 몇 년을 함께 살았다.

아들 입영을 앞두고 우리는 작은 파티를 열며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나는 미리 써놓은 편지를 낭독하고, 신랑과 딸내미도 촉촉해진 눈으로 '잘 갔다 와라' 몇 번을 포옹하고, 뚜리도 옆에서 낑낑 작별인사를 보탰다.

아들은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고 싫었는지 우스개 소리처럼 한마디를 했다.


"아, 분위기 왜 이래? 난 가족들 걱정 하나도 안 한다. 대신, 뚜리만 잘 부탁할게. 하 하 하~"


"야 이놈아~ 뚜리 부탁할 게 뭐가 있냐? 이렇게 사랑받고 안전한 곳에 있는 아이를 뭘 걱정해?"


하지만, 아들이 무심히 던진 농담 같던 걱정이 현실이 돼버렸다.

뚜리는 아들이 군에 있는 동안 뭐가 그리 급했는지 무지개다리를 건너 하늘의 별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뚜리 얘기는, 내 임시저장글에 '뚜리, 이제 안녕.'으로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 뚜리가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우린 아직도 힘들다)

그 동영상 속 뚜리의 모습이 마지막일 거라고는 그땐 그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


우리는 뚜리 일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지만 끝내 비밀일 수는 없었다.

딸내미가 뚜리 장례식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는 바람에 파도타기가 되어 아들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아들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를 걸어와 얼마나 펑펑 울던지 가슴이 메어 내가 다 죽는 줄 알았다.

꿈속에서 뚜리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했다. '어? 뚜리는 죽었는데?' 그러다 잠에서 깨 대성통곡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깊은 슬픔에 빠졌다.


드디어 1년 6개월 복무를 마치고 아들이 전역했다.

전역 하루 전, 아들이 전역동기들 4명과 우리 집으로 함께 오겠다 알려왔다.

타 지역에 살고 있는 동기들이 이번 기회에 광주여행을 해보고 싶다 해(장성 상무대와 광주는 가깝다) 우리 집을 베이스캠프로 이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신랑과 난 그때부터 5명의 아들들을 맞이하기 위해 혼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집안 대청소를 하고, 다*소에서 이벤트 풍선과 각종 파티용품을 사 와 거실에 오색빛깔 풍선을 벽 곳곳에 붙이고 트리전구로 휘감았다.

고기부터 맥주까지 식자재 마트 먹거리를 거의 다 쓸어올 정도로 한가득 장을 봐, 없는 솜씨에 조물조물 음식도 장만하며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시커먼 아들 다섯이 우르르 들어와 거실 벽 한가운데 붙여진 '축! 전역!'이란 글자를 뒤로 하고 우렁찬 경례를 했다.

신랑은 엉겁결에 같이 경례로 답하고 난 아들을 와락 보듬어버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들들은 우리가 장식해 놓은 거실에 둘러앉아 우리가 장만한 음식을 게눈 감추듯 맛있게 먹어주었다.


다음날, 나는 숙취해소용 북어콩나물 국을 끓이고 신랑은 계란말이를 돌돌 말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랑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이었다.


"어머니가 심정지가 오셨어요"


아~

아들이 전역하면 곧 찾아뵈려 했었는데 어머니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기엔 그리 많지 않았나 보다.

누군지도 잘 알아보지 못한 손자였지만 입대 전 '할머니~ 저 잘 다녀올게요, 꼭 기다려주세요~' 인사를 드렸고, 전역하여 '할머니~ 저 잘 다녀왔어요' 인사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이리 허망하게 가버리시다니..


아들을 급히 깨워 그 소식을 알리고 우리는 미쳐 집안 정리도 못한 채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어머니의 심장은 이미 멈춰져 있었다.

우리는 슬퍼할 경황도 없이 바로 장례를 준비해야 했고 부고장을 날려 조문객을 맞았다.

그 사이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중 군복 입은 4명의 씩씩한 장정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광주여행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갑자기 닥친 동기 할머니의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어 했던 의리 있는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십시일반 봉투를 만들어 조의금을 통에 넣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충! 성!' 경례를 드리며 슬픔을 함께해 주었다.

아들은 동기들 앞에서 눈물을 있는 대로 훔쳤고, 어머니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손자 동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조용히 떠나셨다.


아들은 그렇게 그즈음 3명의 여자 때문에 3번 울었다.

짧게 만난 곰신과의 헤어짐으로 울었고, 교통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넌 뚜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었고,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리고 보내드린 할머니와의 아쉬운 이별로 울었다.


나를 닮아 눈물 많고 정 많은 아들이 앞으로 몇 번을 더 울진 모르겠다.

하지만 부디 조금만 울고 더 많이 웃기를 엄마로서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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