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정 떨어지는 순간
딸 친구 파울리나가 학교에서 오는 길, 스포츠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마침 우리 집에서 놀기로 한 날, 기차인지 버스인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대요. 스포츠 가방 안에는 당연히 스포츠 복과 100유로나 주고 산 새 운동화에 도시락통까지 들어있다고 울상이에요. 산책하다 보면 토끼 인형이나 털모자나 장갑 한 짝 뭐든 잃어버린 장소 그대로 길모퉁이 나뭇가지에 고이 올려둔 걸 자주 목격해요. 독일에서 뭘 잃어버리면 운이 좋을 시 분실물 센터에 가면 찾는 경우가 다반사라, 버스 회사에 전화해서 찾게 되면 좋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바로 찾았다는 연통을 받았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이제 겨우 11살 5학년 아이가 그 멀리 학교 다니면서 스포츠 가방 잃어버리는 건 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열 살인 딸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학교를 다니는 게 기특하다고 했는데 며칠 뒤에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마침 파울리나 집에 가서 놀기로 한 날, 그러고 보니 친구랑 논다는 생각으로 들떠서 그랬는지 둘 다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날 뭘 잃어버렸네요.
어른도 지갑을 잃어버리면 성가신 일이 많지만 이제 겨우 김나지움 다닌 지 반년 된 딸도 마찬가지예요. 제일 아까운 건 일주일 치를 미리 끊어둔 왕복 기차 티켓이요. 독일은 교통비가 다른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이거든요. 아이가 등하교 시 15분 정도 타고 두 정거장 가는 기차 티켓이 왕복 3.8유로, 5천 원이 넘어요. 25% 어린이 철도 카드(Jugend BahnCard 25 : 6세~ 18세)는 딱 한 번 9.5유로만 내면 열여덟 살까지 25% 할인된 티켓을 살 수 있어요. 매일 등하교할 경우, 25%는 가입비는 싸지만 50%에 비해 할인율이 낮아서 67유로의 연회비를 내면 반값으로 저렴하게 티켓을 살 수 있는 50% 철도 카드(Deutsch Bahn card)를 신청했어요.
표를 몽땅 잃어버렸으니 새로 사고 할인 카드도 없으니 카드 신청할 때 우편으로 받았던 서류를 사진으로 찍어서 줬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카드 신청 후 카드를 받기 전에 임시로 받은 서류라 효력이 없다는 걸 검표원을 만나고서야 알았어요. 지갑도 잃어버리고 학교에서 식당 카드도 신청하랴 딸이 이래저래 속상하겠다 싶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을 갔어요. 7시 45분에 첫 수업을 들으려면 새벽 6시 40분에 집을 나서서 버스 타고 기차 타고 학교 다니느라 욕본다 싶은 게 짠해서 내리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안아줬는데 표정이 별로예요. 딸은 아빠가 어젯밤에 날짜 지난 서류를 줘서 걸렸다고 울먹여요. 검표원한테 무슨 한소리 들은 게 분명한데 말을 못 해요.
저녁 식사 후에도 아이 표정이 좋지 않아서 재차 묻는데 함구해요. 도대체 얼마나 심한 말을 들었길래 말을 못 하는지 애가 탔죠. “재인아, 네가 말을 안 하면 엄마 아빠가 검표원이 엄청 심한 말을 했다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돼. 얘기를 해주면 좋겠다”라고. 추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요. 뭐라고 했는지 정확한 워딩을 알려달라는데 아이는 도저히 말을 할 수 없대요. 말하기 어려우면 종이에 적으라고 했더니만 싫다고 고개를 여러 번 젓다가 집요하게 묻는 엄마에게 결국 써 준 문장이 “Das ist Betrug다스 이스트 배트룩” 배트룩(Betrug)이라는 단어는 절대 못 잊어요. 역정을 내고서야 들은 말이 고작 '사기꾼'이라니, 안 듣느니만 못해요.
모욕당한 그 순간이 떠오르는지 아이는 울음을 터트려요. 괜찮다고 그 검표원 진짜 나쁘다고 안아줬지만 아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수치감을 느끼며 당황했을 그 순간을 생각하니 분은 안 풀려요. 할인된 표를 샀는데 할인 카드를 소지하지 않는 건 사기꾼이나 다름없다면서 내일도 이렇게 하면 벌금 60유로를 내야한다고요. 카드를 신청한 서류만으로는 안되고 기차를 탔을 때 할인 카드를 소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 검표원은 자신이 할 일을 충실했겠지만 그런 반응이 최선인지는 의문이에요. 어른이라도 그런 순간이면 난감한데 딸은 오죽했을까, 눈물이 날만했어요. 딸은 그 순간 검표원이 괴물처럼 느껴졌대요. 독일이 정 떨어지는 순간이에요. 남편은 분통 터져하며 철도회사에 전화해서 그 밤에 50% 카드 앱을 받았어요.
독일은 버스나 트램을 탈 때 표 검사를 따로 하지 않아요. 기차도 표를 넣고 들어가는 개찰구가 따로 없어요. 대신 불쑥, 예고 없이 검표원이 들이닥쳐 검사를 하는데 그때 티켓이 없어서 걸리면 60유로의 벌금을 내요. 신기한 건 그래도 티켓이 없어서 걸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도덕성을 자발적으로 장착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더 바람직한 건지. 아니면 매번 검사를 해서 도덕성이 낮아질 틈이 없도록 관리하는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이런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람도 종종 있겠죠. 검표원이 들이닥치는 걸 보고 정차했을 시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도 봤어요. 어느 날은 검표원이 일반인 복장으로 탔다가 버스가 출발하고 검사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처음엔 이런 시스템이 낯설어서 신기했고 그다음엔 혹시 누군가 걸릴까 봐 검표원이 검사하는 순간 조마조마했어요. 암행어사처럼 짠 나타나서 일일이 검사하는데 표 없이 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에 안도했어요. 인간의 꽤 도덕적인 면을 발견한 것 같아서요. 한편으론 이런 식으로 갑자기 한다는 건 어쨌든 의심한다는 거니까 불쾌한 구석도 있지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검표원이 검사하는 순간을 즐겼는데 지갑을 잃어버려서 할인 카드 대신 서류를 챙긴 딸이 사기꾼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없던 정도 뚝 떨어지는 거 있죠.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독일에 살아서 딸이 그런 몹쓸 말을 듣게 했는지 미안하고 속상해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심한 말을 들었으니 어른이 되면 표 없이 대중교통을 타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겠어요. 그 뒤로 딸은 표와 할인 철도 카드를 핸드폰에도 지갑에도 철저하게 챙겨요. 카드를 소지하지 못한 날은 할인 카드가 집에 있더라도 원래 가격으로 끊고요. 독일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티켓 검사를 불쑥한다고 방심하면 망신과 벌금은 기본 세트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