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타와 분홍 장미
독일 온 첫해, 마리타는 가족의 생일을 모두 적어가셨어요. 얼떨결에 실제 생일과 다른, 주민번호 상의 형식적인 날짜를 알려드렸죠. 왜 물어보셨을까 궁금했는데 3월 1일 날 정확히 선물을 전해줬어요. 매년 날짜가 바뀌는 음력 생일을 설명하기도 애매해서 그날은 마리타만 아는 특별한 생일이 됐어요. 마리타는 남편과 오누이의 생일까지 모두 세련되게 챙기셨어요.
마리타는 피터와 아래층에, 우리 가족은 위층에 한 건물 세입자로 사는 사이예요. 칠십 대 중반의 그녀는 유쾌하고, 집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고 정갈했어요. 꽃과 나무가 적당하게 자리 잡은 정원의 잔디가 지저분해질 틈이 없을 만큼요. 새 모이와 물이 떨어지지 않게 채워두는 걸 보면 매일 아침 찾아와 지저귀는 자연의 소리에 기쁨을 누리시는 분이 분명해요. 한 달에 한 번 혼자서 염색을 하고, 주말에 피터와 외식하러 갈 때 곱게 차려입으시는 모습에는 절로 감탄했어요.
독일 살이 3년 차, 봄에 마리타가 많이 아팠어요. 큰 수술을 앞두고 검사를 받느라 일주일간 입원했다가 퇴원했는데 병원에서 생일 당일에 문자로 축하해 주셨어요. “유진, 생일 축하해. 모든 일이 잘 되고 좋길 바란다”라는 간결하지만 기분 좋은 메시지였어요. 집으로 돌아온 후, 다리가 많이 부어서 걷는 게 여의치 않다고 아래층으로 와 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조각 케이크를 사서 온 식구가 우르르 출동했죠. 독일은 생일 선물에 대한 답례로 차와 케이크를 대접해요.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은 선물이 탁자 위에 놓여 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포장지를 풀어요. 생일을 누군가 기억하는 것도 부끄럽고 선물을 받는 건 더 민망하고 낯설어요. 열흘 후 즈음, 큰 수술이 예정되어 일찌감치 선물을 준비하셨나 봐요. 편찮으신 와중에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 챙시기시나 몸 둘 바를 모르게 감동스러웠어요. 그땐 몰랐어요. 그게 마리타의 마지막 선물일 줄은요.
여름에 태어난 할머니의 일흔여덟 번째 생신은 정원에서 동그란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축하했거든요. 그렇게 무덥지 않던 그해, 화창한 날씨와 산들산들 불던 바람과 간간이 들리던 웃음소리까지, 행복했던 순간이 지나치게 선명해요. 우리는 차 내부를 청소할 때 요긴한 소형 전기 청소기를 준비했고 마리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딸이 그림을 그리고 카드를 썼어요. 마침 그녀 친구들이 장미를 선물했다며 부엌 창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함께 심었는데 다음 해 여름, 흐드러지게 핀 분홍 장미를 마리타는 보지 못했어요.
어릴 땐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나지 않아요. 자식의 생일을 가장 잘 챙기는 사람은 엄마일 텐데, 저한테 엄마란 존재가 꽤 이른 나이부터 없었거든요.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마리타 연세와 비슷할 거 같아요.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가 태어난 날이 곧 출산일이라 엄마가 유독 더 생각났어요.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막내딸로 귀하게 자란 명순자씨는 12형제의 장남에게 시집와서 서른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까지 딸을 다섯 명이나 낳으셨어요. 그때 그 시절 엄마의 삶이 어땠을지 감히 가늠이 안돼서 무작정 기뻐하기 힘들어요.
가족을 꾸리고선 케이크에 초를 밝히고 남매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거나 근사한 곳에서 외식했어요.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는 게 제일 좋은 선물이라면서요. 매년 맞는 생일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서 한국에선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독일 사람들은 친해지면 생일을 꼭 묻고 큰 선물은 아니더라도 손 편지를 쓰거나 잊지 않고 축하해요. 처음엔 재차 생일을 확인하는 친구에게 혹시라도 생일을 축하할까 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기억할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쳤어요. 그랬더니 한 친구는 "생일이 없었다면 넌 이 세상에 없었잖아. 엄청 중요한 날이지" 하면서 생일 당일에 직접 찾아와서 노래까지 불러줬어요. 그래서 독일은 생일 전엔 축하하지 않나 봐요. 생일날 이후에만 내가 존재하게 된 거니까요.
생일의 중요성을 별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독일에 와서야 의미를 되새겨요. 요란스러워서 생경한 문화에 또 다른 친구에게 "독일 사람에겐 생일이 왜 그렇게 중요해?" 물었더니만 되레 "그럼 네게 중요한 날은 언제야?"라고 의아해하며 되물어요. 딱히 떠오르는 날이 없더라고요. 매일을 특별하게 잘 보내는 게 중요하지, 무슨 날만 특별하게 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건 궁색한 핑계예요. 생각처럼 매일을 특별하게 보내진 못하니까요.
보디로션을 바르면서 향수를 뿌리면서도 이건 언젠가 마리타가 선물한 거구나, 읊조려요. 마리타는 없는데 그녀의 선물이 일상 곳곳에 놓여있어요. 그녀를 만난 지는 겨우 3년 남짓인데 선물한 게 이렇게 많다니요. 딸은 메모리 게임이나 마우마우 카드 게임을 하면서도 “이건 마리타가 선물한 거야. 할머니 보고 싶다” 가끔 얘기해요. 흐드러지게 핀 분홍 장미 꽃잎이 여지없이 스러지는 걸 보면서 곧 다가올 생일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져요. 내년에도 올해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맞을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려우니까요. 살아있을 때 최대한 기쁘게 축하하는 게 생일 같아요. 죽으면 생일은 저절로 잊히고 제삿날만 기억될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전 엄마의 생일을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더라고요.
*북이오 프리즘에 연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