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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그레이스 Jan 31. 2021

디트리히 본회퍼

타인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14)

여덟 번째 메시지 :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마태복음 11장 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상,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원하지 않으며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완전히 버려진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데도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말씀의 진실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분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영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자기 주변에 모으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이 말씀은 내게 해당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없도록 그 범위를 무한대로 넓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하신 초청의 말씀에서 기이하고 놀라운 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 입니까자신이 그렇게 느끼든 그렇지 않든, 이 말씀은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분명 외적으로 혹독한 운명의 멍에 아래 수고하며 일해야 하는 남성이나 여성, 어린아이들이 분명합니다. 어두운 인생, 즉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환경이나 외적, 도덕적으로 비참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혹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올해 휴가 기간에 보았던 프랑스 북부의 산간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인상을 강하게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 채찍에 맞으며 굴욕적이고 치욕적이며 고통스러운 인생을 조상 대대로부터 자자손손 물려주고 있었습니다. 노동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임을 체험해야 하는 그곳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을 가난한자들 속에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부유층에서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부유한 젊은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며 살기에는 너무 연약한 그 젊은이는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가 정말로 원하던 모든 것을 전부 소유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텅 비어 있고 공허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재물로는 이 세상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내면의 평화와 영적인 기쁨, 부부의 사랑, 가정의 화목 등을 살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 마침내 올 것입니다. 그처럼 침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와 함께 찾아온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 심한 죄책감으로 인한 무거운 짐이 겉으로는 행복할 것처럼 보이는 가정들 속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렘브란트가 그의 동판화에 묘사해 놓은 것처럼 가난한 자, 곤궁한 자, 병든 자, 한센병 환자, 난쟁이, 주름살투성이의 찌그러진 몰골의 사람들만 아닙니다(렘브란트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삶을 주제로 ‘설교하는 예수’라는 동판화를 조각했는데, 그중에는 어린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장면,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다-옮긴이). 젊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화려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끝없이 버림받은 느낌으로 괴로워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겉치장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썩어 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삶이 역겨운 것입니다. 외관상으로 행복해 보이는 이들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분주한 일상생활에 파묻혀서 자신의 고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실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을 느끼며 알고 있기에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 더욱더 헛된 행복을 찾아 몸부림치고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입니다그들은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갑절이나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정말로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기서 ‘다’라는 말은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초청하시는데,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신은 이 말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도대체 무슨 듯인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지탱해 주던 내면의 힘을 잃고 자기 한 몸도 버겁게 여겨질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고 앞에 놓인 산이 두렵기만 할 때, 죄책감이 짓누르고 온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이나 이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모든 것을 들어주며모든 것을 참고모든 것을 믿으며모든 것을 바라고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고전13:7). 그는 오직 당신은 안식과 평화나의 동경이시라내 속의 모든 불안을 잠재워 주시네라고 고백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의 눈길 아래서 모든 고통이 해소되며, 그의 말없는 사랑 앞에 마음이 열리게 될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모든 긴장과 근심을 해결하며 우리 영혼을 세상에서 견져 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그 사람이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자발적으로 우리를 도와주고우리를 초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는 우리의 안식이자우리의 평화입니다그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그는 참 인간이셨고진실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며우리의 구원자이자 평화이며 안식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내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말, 혹은 어떤 목회자가 아니라, ‘내가라고 하셨습니다그분은 우리를 모두 아시며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고난을 친히 참고 견디며 감당하신 인간 예수님즉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힘겨운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돕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그 사람의 짐을 모두 취하여 앞으로 더 이상 그 짐을 지지 않도록 해주거나그 사람이 자기 짐을 계속해서 질 수 있도록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첫 번째 방법을 택하지 않으십니다그분은 우리의 짐을 없애 주지 않으십니다자기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짐을 져야만 하는 존재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십니다또한 아무런 짐을 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오직 이러한 짐을 감당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사실을 아십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삶에 부여하신 짐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단지 우리에게 그 짐을 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심으로우리가 져야 할 짐을 가볍게 해주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는 그 자체로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고 있는 짐에 멍에를 더하여 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멍에는 다른 짐을 가볍게 해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고도 멍에로 인해 감당할 만하게 됩니다우리는 멍에를 메고서 물 지게를 지는 사람들을 알고 있고수레를 끄는 짐승들이 멍에를 메고서 그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끌 수 없는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멍에는 자기 힘으로는 벅찬 무거운 짐을 고통이나 상처 없이 지게 도와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이 너무 버겁지 않도록우리를 그러한 멍에 아래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예수님은 나의 멍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즉 예수님이 자기 짐을 지는 법을 배우신 바로 그 멍에입니다예수님이 감당하셔야 했던 짐은 우리 모두의 짐을 합한 것보다 수천 배 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우리 모두의 짐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이 말씀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나와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발맞추어 가자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떨어질 수 없도록예수님의 멍에를 메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발맞추어 가자는 것입니다언젠가 우리가 와전히 멍에를 벗게 될 그날까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내게 배우라...” 내가 이 멍에를 어떻게 메고 가는지를 보고 똑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이 메신 멍에는 그분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멍에, 즉 우리가 메야 할 멍에도 그분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줄 예수님의 멍에는 바로 그분이 온유와 겸손입니다. 여기서 온유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말라는 뜻입니다(9:5, 26:14참조). 자신이 져야 하는 짐에 대해 반항하는 자세를 갖지 말며짐을 밀쳐 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상처가 나도록 짐을 밀쳐 내려고 하지 말고잠잠히 인내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짐을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짐을 지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며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여기서 겸손이란 자신의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들지 않으며도리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겸손이란 우리가 종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그리고 종으로서 짐을 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그와 동시에 우리 하나님이 선하신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며우리가 지는 짐으로 인해 우리가 언젠가 거룩하고 겸손하며 순결하게 변화되면그분이 친히 우리 어깨이 짐을 풀어 주시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축복의 날을 소망하며, 수고스러운 삶과 무거운 죄의 짐에서 해방될 그날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러나 이 말씀을 두고서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아주 쉬운 것처럼 말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차라리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얼마나 진지하고 무서운 일인지를 알고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면, 감히 그리스도를 따를 엄두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달은 사람에게 ‘이제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모든 것이, 정말이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선 그 사람에게는 모든 두려움과 놀라움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내 멍에는 쉽고...’라는 말씀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한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의문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에게 갈 수 있고,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그러므로 바로 여기에서 혹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께 묻고 구하십시오그러면 예수님이 갑자기 여러분 앞에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여러분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여러분은 그분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그분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을 돕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여러분의 멍에를 메고 기뻐하며예수님 곁에서 안식하게 될 마지막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승리는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싸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며, 

나는 생명수 강가에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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