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13)
고린도전서 2장 7-10절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현대인의 삶에서 비밀의 부재는 우리의 가련함이며, 몰락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비밀을 존중하는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비밀을 존중하는 만큼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온통 비밀에 둘러싸여 있음을 아는 어린아이의 눈은 활짝 열려 있고 맑게 소생합니다. 그들은 아직 이 세상의 삶을 모르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며, 세상에 가득한 비밀과 부딪혀야 하는지 모습니다. 반면, 우리 어른들은 비밀이 있으면 인간 존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고 생각하기에 비밀을 파괴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어른들에게 비밀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방해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왠지 비밀을 무시무시하다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비밀을 친근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는, 비밀이 우리와는 다른 본향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존중하지 않는 삶은 우리 개개인이 삶과 타인의 삶 속에 있는 비밀을 알지 못하며, 이 세상의 비밀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나 타인의 삶 속에 숨어 있는 내밀한 것, 이 세상에 숨겨진 깊은 비밀을 무심코 지나치며 피상적으로 대합니다. 계산할 수 있고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만 보며, 계산할 수 없고 이용할 수 없는 이 세상 너머의 것들은 보지 않습니다. 비밀을 존중하지 않는 삶이란 우리 인생에 선행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전혀 보려고 하지 않고 아예 부인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가 어두운 땅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빛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어머니 모태의 어둡고 은밀한 장소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즉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의 원천이 모태이듯 우리의 정신적 삶의 소산도 은밀하게 숨겨진 어두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비밀에서 기인한 것임을 도무지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밀한 일을 들으면, 그 비밀을 드러내려 하며, 그것을 계산하고 설명하며 해부하려 듭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삶을 죽일 뿐, 비밀 자체를 알아내지는 못합니다. 비밀은 여전히 비밀로 남겨져 있습니다. 비밀은 우리의 손을 피해 숨어 버립니다.
비밀이란 단순히 무언가에 대해 모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이 우리에게 가장 큰 비밀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가 그것을 더 잘 알게 될수록 더욱더 비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비밀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사람에 대한 비밀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욱더 비밀스러워질 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가까워질 때. 모든 비밀은 궁극적인 깊이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비밀의 강력한 힘과 영광을 이곳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될 때, 그들 사랑의 비밀은 무한히 커집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온전히 알게 되며, 서로를 온전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 안에서 서로를 더욱 알아갈수록, 그들 안에 있는 사랑의 비밀 역시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지식은 비밀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이토록 가까이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밀입니다.
왜 하필이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념하는 주일에 제가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적인 방법을 토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비밀이라는 개념 앞에서 자주 아연해지곤 하지만, 비밀이라는 개념 없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묘연해지고 맙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통하는 상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고 싶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그분의 존재는 우리에게 비밀이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비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르지 못한 본향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비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러한 비밀을 소멸시키는 도구가 되거나,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비밀을 상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은 우리를 뛰어넘는 그분의 비밀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은밀하게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를 내밀함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즉 이 비밀을 통해, 비밀의 근원인 본향이 눈앞에 그려지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암시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비밀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들이 계산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하나님만 원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숨겨져 있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비밀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상을 만들지만, 가까이 계시며 은밀하게 숨어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이용 가치를 저울질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세상에서 유명해집니다. 하지만 비밀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비밀은 어린아이들에게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낱 목수에 불과한 나사렛 예수가 영광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비천하며 무시당하고 약하게 되셨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신성을 덧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고,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바로 은밀하게 숨겨진 지혜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듣지 못했으며, 그 누구도 마음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천함과 가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인간에 대한 사랑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바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놀라운 비밀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성령 안에서 우리 마음을 열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세 분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붙잡고 계시며 구속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동시에, 개별적으로 창조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비밀로서 경배하고 이해하는 신성의 깊이입니다.
우리의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온 세상에 대한 성령의 은사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겨우 암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이것이 바로 그분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며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쳐 온 것은 종교의 합리적인 교리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끊임없이 암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의 의미는 아주 단순하여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진실로 오직 한 분이시며, 이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고, 완전한 사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미약한 찬송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영화롭게 되시며, 온 세상을 품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깊이 거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경외심, 사랑으로의 초청입니다. 이제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께 모든 영광을! 아멘.